엿새간 일본 출장일정을 마치고 12일 귀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다음날 경영진들을 소집해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 마련을 지시했다.
일본 수출 규제가 스마트폰·TV 등 전 제품 생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에도 대비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 사태에 따른 대책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비상경영을 선포함 셈이다.
다만 이번 출장을 통해 이 부회장이 수출규제를 대상이었던 3개 핵심소재 물량을 일부 확보했다는 관측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소재 물량확보를 숨통을 트일 정도로 쥐어짜듯 모으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이것이 이 부회장의 출장으로 마련된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일본 출장을 마치고 12일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귀국한 이재용, 어떤 해결책 갖고 왔을까일부 매체 보도와 달리 사실상 이 부회장의 일본 출장에서 직접 소재 공급과 관련해 해결된 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 측은 "이 부회장이 출장 후 사장단 회의에서 현안을 살피고 미래를 대비하도록 지시한 것은 맞지만 일본 출장서 신규 계약을 따냈거나 추가 물량을 확보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삼성전자는 일본의 수출규제 방침이 나온 후 여러 경로를 통해 시장에 남아있는 소재를 숨통이 트일 정도의 물량은 확보한 것으로 전했다.
확보 물량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어떤 경로를 통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재고량과 함께 당장 심각한 생산 차질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확보한 물량이 현지 소재 생산업체로부터의 직접수입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또 일본 정부의 수출 통관 규제를 직접 벗어날 수는 없는 만큼 일본 소재 생산업체의 해외공장 물량을 우회 수입하는 데 합의를 봤거나 다른 조달처를 확보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 3개 품목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수적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 포토 레지스트(PR), 고순도 불산(HF)이다.
그간 일본은 자국 업체가 이들 3개 품목을 한국에 수출할 때 한번 포괄적인 허가를 받으면 3년간 개별 품목에 대해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포괄허가'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번 보복 조치를 통해 이 같은 우대 조치가 폐지되고, 개별 제품을 수출할 때마다 주무 부처인 일본 경제산업성에 수출허가를 신청해 심사를 거쳐야 한다.
◆"컨틴전시 플랜 마련해 2차 피해 대비하자"
이 부회장은 출장을 마친 다음날인 13일 긴급 사장단 회의를 주재해 일본 현지상황을 알리고 대(對)한국 소재 수출 규제 등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는 김기남 DS부문장(부회장)과 강인엽 시스템LSI 사업부장(사장), 진교영 메모리사업부장(사장),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단기 현안 대처에 급급하지 말고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의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며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는 한편 흔들리지 않고 시장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역량을 키우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컨틴전시 플랜' 마련을 지시하며 일본이 수입 통제를 확대할 경우 반도체 부품은 물론 휴대전화와 TV 등 모든 제품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도 대비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핵심 소재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중국, 대만, 러시아 등 거래선을 다변화하는 한편 국내 소재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다각적인 방안도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왼쪽부터) 김기남 DS부문장(부회장)과 강인엽 시스템LSI 사업부장(사장), 진교영 메모리사업부장(사장), 이동훈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사진제공 = 삼성전자]
◆장기화될 때 위기는 여전…"지구적 파장 우려도"삼성전자 차원에서 긴급물량을 확보하며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긴급물량 확보와 기존 재고량 더해 '단기간 생산라인 가동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장기화되면 생산 차질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단기간에 일본산 소재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일본의 수입 통제가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고 말했다.
앞서 또 다른 관계자는 "최악의 경우 일부 공정이 1~2개월가량 가동을 멈출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주요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로 국내 반도체 생산이 중단되면 전지구적 문제로 파장이 확산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창원 노무라금융투자 리서치센터장은 "한국이 가진 D램은 전 세계 시장점유율이 75%로 영향력이 굉장한 제품"이라며 "일본의 주요 소재 수출규제에 따라 국내 반도체 생산이 2개월여만 중단돼도 지구적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밝혔다.
[디지털뉴스국 김승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