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 말고 다른 걸 골라봐. 감자튀김이나 아이스크림은 사줄게."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롯데리아 매장에서 만난 주부 김 모씨(38·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4살 짜리 아들을 달래고 있었다. 아이가 떼를 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햄버거 매장에 들어섰지만 아이와의 실랑이는 계속 됐다. 김 씨는 "요즘 설익은 햄버거 패티를 먹고 병에 걸렸다는 피해 사례가 사회적 이슈가 된 만큼 (아이에게) 햄버거를 안 먹이려고 했다"며 "하도 졸라서 들어오긴 했지만 햄버거가 아닌 다른 사이드 메뉴만 사줬다"고 말했다.
이에 앞선 지난 8일 저녁에 찾은 서울 동대문구의 맥도날드 매장은 한산했다. 가족 단위 고객으로 붐벼야 할 주말 저녁 시간이지만 계산대는 물론 4대의 무인주문결제단말기(키오스크) 앞까지 텅 비었다. 매장 밖에는 배달 오토바이 11대가 주차돼 있었고, 배달원들은 무한 대기 상태였다. 배달원 이 모씨는 "햄버거 병 논란이 생기고 난 후 배달 주문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며 "저녁 6시 30분이면 가장 피크타임인데 보다시피 일이 없다"고 말했다.
햄버거 전문 프랜차이즈 매장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시내 일대 햄버거 매장에선 이용객 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특히 어린아이를 동반한 고객들이 자취를 감췄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햄버거 가게 7곳을 순차 방문한 결과 10살 이하 어린이 고객은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다.
성인 고객들 역시 줄어든 것은 마찬가지다. 서울 종로구의 한 패스트푸드점 직원은 "체감상 평소보다 고객 수가 30% 이상 줄어든 것 같다"며 "햄버거를 주문하면서 고기 패티를 제대로 익혀달라고 부탁하는 손님들까지 생겨났다"고 말했다. 햄버거 이외의 메뉴를 선택하는 사람도 늘었다. 서울 명동 소재 맥도날드 매장 관계자도 "햄버거 병 논란 이후 햄버거는 조금 덜 팔리고 음료랑 감자튀김, 치킨텐더 등 서브 메뉴가 많이 나가는 편"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햄버거 병 논란은 지난해 9월 경기 평택시의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불고기 버거를 먹은 A양(4)이 용혈성요독증후군(HUS) 진단을 받은 게 발단이 됐다. 이 질병은 장출혈성 대장균 감염증에 감염된 후 신장 기능이 저하되면서 생기는 합병증이다. 출혈을 동반한 설사가 주요 증상이다. 이후 몸이 붓거나 혈압이 높아지고, 심하면 경련·혼수 등 신경계 증상까지 나타난다. 용혈성 빈혈, 혈소판감소증, 급성신부전 등의 합병증이 나타나며 사망률은 5~10%로 알려져 있다. 1982년 미국에서 덜 익힌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먹은 사람 700여명에게 집단 발병하면서 '햄버거 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원인균은 병원성대장균 O157이며, 주요 감염 루트는 제대로 익히지 않은 육류, 신선하지 않은 우유나 오염된 야채 등으로 다양하다. 섭씨 70도 이상 온도로 2분 이상 가열하면 죽는 대장균의 특성상 잘 익히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발병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난 5일 피해자 가족은 A양이 먹은 고기 패티가 덜 익어서 병에 걸렸다며 맥도날드 한국지사를 검찰에 고소했다. A양은 신장이 90% 가까이 손상돼 배에 구멍을 뚫고 하루 10시간씩 복막투석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 커뮤티니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선 '맥도날드 불매운동'에 이어 '햄버거 안 먹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맥도날드 햄버거와 질병의 인과관계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포 심리는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4세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 정일영 씨(37)는 "앞으로 우리 아이에게는 절대 햄버거를 안 먹일 계획"이라며 "아이가 있는 주변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6세 아이의 아버지인 이강국 씨(34) 역시 "이번 사태가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햄버거에 대한 이미지를 나락까지 떨어뜨린 것 같다"며 "햄버거 뿐 아니라 고기를 다져서 만드는 음식 자체에 대해 두려움이 생겼다"고 말했다.
의학계에서는 일반 스테이크 등 대장균이 거의 없는 부위는 괜찮지만, 대장균이 많은 육류의 내장 부위는 잘 익혀 먹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내장에 닿은 조리도구를 통해 균이 옮을 가능성이 있는 햄버거 패티 등 분쇄육의 경우도 최대한 잘 익혀야 한다. 우유는 살균이 된 것이나 최대한 신선한 것을 섭취하고 야채 역시 신선한 것을 잘 씻어 먹는 것이 중요하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조리할 때 썼던 도구들도 오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깨끗하게 씻어서 사용해야 한다고 의학계는 조언한다.
햄버거 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롯데리아·버거킹 등 주요 업체들은 햄버거 패티 점검 횟수를 늘리고 자체 역학조사를 실시하는 등 식품 안전 관리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아직 진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햄버거 공포증만 퍼지면서 매출 감소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모처럼 수제버거 등으로 훈풍이 분 햄버거 시장이 침체에 빠질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백상경 기자 / 이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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