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3일 “기업이 회생 절차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서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식의 기업 운영 방식은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원칙 이상의 강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류대란 사태를 초래한 한진해운 뿐 아니라 구조조정을 앞두거나 현재 진행중인 기업 모두를 포괄하는 메시지라고 청와대측은 전했다.
한진그룹이 ‘대마불사’(大馬不死·큰 기업은 절대 죽지 않음을 뜻하는 말) 신화에 의지해 법정관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면서 수출입 피해가 커진데 따른 경종을 울리겠다는 의지로도 해석된다.
이날 청와대 한 관계자는 “기업 부실에 책임이 있는 대주주와 경영진이 스스로 회사를 살리기 위한 자구노력을 게을리 할 경우 정부가 막대한 국민 혈세를 써가면서까지 지원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진그룹 경영진을 향해 사태해결 때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한진해운은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대주주나 그룹 차원의 자구책이 매우 미미했던 상황이었고 그 결과로 법정관리로 갈 수 밖에 없었다”며 “이후 벌어진 물류대란 사태에서도 한진그룹은 ‘나 몰라라’식 태도로 일관하다가 사태를 키운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꼬집었다.
이는 박 대통령이 “해운이 마비되면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도와줄 수 밖에 없다는 안일한 생각이 이번에 국내 수출입 기업들에게 큰 타격을 줬다. 이번 일(물류대란 사태)을 계기로 한 기업의 무책임함과 도덕적 해이가 경제 전반에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오는지 모두가 직시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청와대 다른 관계자는 자구방안이 반드시 대주주의 사재출연을 포함해야 하느냐는 반론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 한진해운의 경우 꼭 조양호 회장 사재를 출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며 “대주주 사재출연 말고도 그룹 차원의 지원을 보다 확대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한진해운식 기업 운영 방식을 결코 묵인하지 않겠다고 강조한 대목은 이날 재계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물류대란 사태가 어느정도 마무리된 이후 한진그룹 경영진의 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가 정부 주도로 시작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물류대란으로 피해를 본 수출기업과 화주들 입장에선 이미 한진해운측에 비용을 지불해 놓고 당한 것 아니냐”며 “사태 수습후 구상권 청구 등 한진해운을 상대로 한 법적 소송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전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한진해운이 수출입 화주를 볼모로 지원을 요청하는 ‘벼랑 끝 전술’을 썼다고 보는 것 같다”며 “앞으로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슷한 전례를 차단하기 위해 한진을 도마에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한진해운과 비슷한 시기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를 받았던 현대상선은 회생과 법정관리 시나리오를 모두 갖고 투트랙으로 생존 전략을 짰다.
반면 한진해운은 지난달 31일 법정관리 신청 직전까지 배에 짐을 실으며 화주들 피해가 가중됐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에 일선 물류업체 관계자는 “한진해운이 수출허가 화물 운송은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정부와 협의해 시간을 벌어야 했다”고 말했다.
13일 금융위원회와 자율협약 당시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도 “한진그룹이 5월 자율협약을 신청하기 이전부터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한진 측이 3월초 운영자금 부족 등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진 후 2개월 가량을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며 “채권단과 사전 협의없이 5월 4일 미흡한 내용의 자율협약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한진해운은 지난달 자율협약이 중단되기 직전에는 선박금융 협상과 해외 선주 용선료 조정이 마무리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금융위는 “내용을 놓고보니 용선료 조정은 산업은행 등이 부족자금을 메워준다는 조건 하에 선주사들과 구두 합의된 수준이었다”며 “선박금융 협상 역시 진전이 미흡했다”고 말했다.
법정관리 직전 화주 피해를 줄이기 위한 물류정보 공유를 놓고도 마찰음이 나왔다. 산업은행에 따르면 채권단은 법정관리 신청(8월31일) 이전인 지난달 3일, 10일, 17일 세 차례에 걸쳐 한진해운에 화주·운항정보 등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해운업계 고위 관계자는 “한진 측이 조양호 회장 입만 바라보며 협상력에 한계를 드러냈다”며 “법정관리가 임박해 나온 대주주 지원 등 사전에 시간을 갖고 논의하면 풀릴 수도 있었던 문제도 끝내 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 TTI(Total Terminals International) = 롱비치터미널 운영법인.
[남기현 기자 / 김정환 기자 / 정석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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