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1위 이동통신 회사가 투자를 늘린다고 해서 일감이 늘겠다 싶었죠. 그런데 몇달 째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예요. 무슨 이유가 있나 알아보니 정부 심사가 지연돼 투자가 멈췄다고 하더라구요. 심사가 길어지면 저희같은 작은 중소기업은 생존 자체가 어렵습니다. 1분기 매출은 벌써 반토막 났습니다.”
지난 20일 만난 신윤재 HFR 이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 성남시에 있는 HFR은 유·무선 통신 장비를 만드는 중소기업이다. SK텔레콤 네트워크 구축 사업 협력업체 중 한 곳이다. 신 이사는 “투자가 집행되지 않아 5개월째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면서 “우리같은 장비회사들 모두 죽겠다고 아우성”이라고 전했다. SK텔레콤에 따르면 이런 중소기업이 2500여사에 달한다.
80여년만의 5월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국내 방송·통신업계는 사상 유례 없는 불황으로 꽁꽁 얼어 붙어있다. 중국 기업들 물량공세에 따른 공급과잉으로 정보통신기술(ICT) 수출은 7개월째 내리막이다. 내수도 엉망이다. 올 상반기 국내 장비업계 최대 기대주로 꼽혔던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M&A)이 공정거래위원회 심사 지연으로 자꾸 늦어지면서 ICT 업계는 혹독한 빙하기를 맞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ICT업계는 세계적 경기불황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내수마저 투자가 끊겨 벼랑에 내몰리고 있다”며 “정부 결정이 늦어지면 늦어질 수록 국내 방송통신시장에 대한 불확실성만 증폭돼 투자가 위축되고 경제활력은 떨어진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SK텔레콤·CJ헬로비전 등 당사자들은 신규 사업 추진이 어려워지면서 성장동력을 잃고 있다. SK텔레콤은 사실상 신규 투자를 중단한 상태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CJ헬로비전 인수·합병을 발표하면서 5년간 네트워크 고도화와 서비스 강화에 총 5조 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이중 3조원 이상을 초고속인터넷의 기가급 확대·케이블망 디지털 전환·노후망 업그레이드 등 네트워크 인프라스트럭처 확충에 투자할 예정이었다. 또 고품질 드라마와 1인 미디어를 육성하기 위해 총 3200억 원 규모 콘텐츠 펀드를 조성한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그러나 발표 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SK텔레콤은 어떠한 사업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합병승인이 지연되면서 기본 인프라 투자는 물론 차세대 기술 투자마저 최소 규모로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며 “글로벌 통신 미디어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혁신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바라만 봐야헤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CJ헬로비전도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다. 피인수되는 처지여서 운신의 폭은 더욱 좁다. 매년 100여명 규모로 진행했던 공채도 올해는 취소했다. 적극적으로 사업을 못하다보니 실적도 나빠지고 있다. 1분기 CJ헬로비전 매출은 전년 대비 4.9% 감소했고, 영업이익도 6.6% 하락했다. CJ헬로비전 관계자는 “회사가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사내 모든 부문이 어떠한 의사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에 1분기는 한해 농사를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지만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 됐다”고 했다.
불확실성 여파는 통신장비업계까지 미치고 있다. SK텔레콤이 망 고도화 사업에 투자하는 3조원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을 기가 인터넷 망으로 확장하고, 아날로그 케이블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국내 유선 통신망 부문은 외산 장비업체가 우위를 점한 무선 통신망과 달리 국내 장비업체들이 9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 유선 통신 투자가 주춤하면서 국내 통신장비업체들은 매출 정체에 직면해 있다. 이때문에 3조 원에 달하는 SK텔레콤 투자는 얼어붙은 통신장비 시장에 직접적 수혜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SK텔레콤 투자가 ‘올스톱’되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서울 구로에 있는 유선통신 장비업체 디오넷의 오창섭 사장은 “3조 원은 국내 네트워크 시장 규모에 맞먹는 금액”이라며 “이 정도 투자액이 국내 장비업체에 골고루 돌아간다면 기업들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실탄을 마련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아서 아쉽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이 장기화할수록 우리 기업들 경쟁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 2월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GSMA)는 “이동통신업계의 인수·합병이 정부의 이중심사로 인해 사업이 위축되고 경쟁을 왜곡해 소비자 복지를 침해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곽은경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장은 “불허든 허가든 하루빨리 결정이 나야 기업이 다음 스텝을 밟고 시장도 굴러간다”며 “공정위의 이런 모습은 규제를 완화하고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자는 정부 기조와도 안 맞는다”고 꼬집었다.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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