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국 금융위기가 오기 직전 매일경제는 부즈 앨런 보고서를 통해 ‘넛 크래커’라는 비유를 처음 사용했다. 한국경제가 첨단 기술력으로 무장한 일본과 저임금에 기댄 중국의 저가공세에 끼여 경쟁력을 잃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 것이었다. 비용으로는 당시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을, 효율로는 일본을 앞지를 수 없다는 게 보고서의 골자였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한국이 고사위기에 처했음을 알린 최초의 보고서였다. 특히 당시 철강, 반도체, 가전과 자동차를 비롯한 국내 주력 수출상품마저 ‘넛 크래커’ 신세에 처할 것이란 충격적인 진단을 내놨다. 부즈 앨런 보고서는 이와 관련해 “정경유착을 통한 무리한 중화학공업화이 서비스 산업의 발전을 지체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1997년에 발표됐지만, 분석대상은 1996년 겨울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9년이 흐른 2015년 한국은 또다른 형태의 ‘넛 크래커’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른바 신(新) 넛 크래커다. 중국의 기술에 밀리고, 일본의 가격에 치이는 상황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불황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일본은 원천기술과 소재 경쟁력, 아베노믹스를 통한 엔화가치 절하를 등에 업고 세계시장에 재등장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상반기 결산을 발표한 511개 도쿄증시 상장기업의 실적을 분석한 결과, 경상이익이 16%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도요타, 닛산 등 자동차 제조기업들이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약진했다.
샤오미를 앞세운 중국기업들의 공격은 더욱 매섭다. 과거 저임금·저효율 구조에서 벗어나 기술과 디자인 면에서 한국과 급속도로 격차를 줄이고 있다. 2012년 1.9년이던 양국의 기술격차는 불과 2년만에 1.4년으로 줄었다. 또한 중국은 지난 5월 항공우주,로봇 등 첨단산업을 2025년까지 독일, 일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고, 고부가가치 제조업 위주로 산업을 재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한국기업들은 원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외 공장 이전을 추친할 뿐 새로운 먹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부문연구장은 “중국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는 지금 내수와 서비스 등 소프트 분야 혁신이 늦어지면 조만간 따라잡힐 수 있다”며 “단기적인 경기부양보다 장기적인 산업구조 개편에 힘쓸 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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