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기획실에서 근무하는 박 상무(52·여)는 부하직원의 업무 보고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지난달 계약서상의 실수로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최근 회의 때 견적금액 기억이 나지 않는 등 전에 없던 실수가 잦아지자 속이 타 들어가고 있다. 대기업의 꽃이라는 임원까지 되었지만 그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긴장 탓인지 아파트 비밀번호도 기억나지 않고, 책상서랍 열쇠의 잠금 비밀번호도 바로 생각나지 않는다. 치매가 온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업무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지고 있다. 빨리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떻게 관리해야할지 막막한 박 상무. 한방병원을 찾은 그녀에게 내려진 진단명은 ‘경도인지장애’. 바쁜 업무 혹은 건망증으로 보고 관련 증상들을 가볍게 넘긴 시간이 후회스럽다고 그녀는 전했다.
경도인지장애 (mild cognitive impairment)는 동일 연령대에 비해 인지기능, 특히 기억력이 떨어져 있지만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능력은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다. 즉, 아직은 치매가 아니지만 치매로 진행할 수 있는 정상노화와 치매의 중간 단계로 빠른 시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치료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최근 한 대학병원의 2012년 전국 치매 역학 조사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한국노인 중 27.8%가 경도인지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정상인들은 1년에 1% 미만으로 치매가 발생하지만 경도인지장애 환자군의 경우, 8~10% 정도로 10배 가까이 발생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 경도인지장애 치료 및 관리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
경도인지장애 관련 연구들을 통해 밝혀진 것은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그리고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환자일수록 치매에 대한 조기 검진 및 치료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억력저하를 주로 호소하는 같은 경도인지장애 환자라도 다음과 같은 불편감을 느끼면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치매로 진행할 확률이 높아 치매 조기 검진 및 치료를 통해 치매 발병을 지연시키고 치매 환자의 평균 중증도를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
경도인지장애의 주된 증상인 건망증에 대해 한의학에서는 그 원인을 여러 가지 요인에서 파악하고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건망증이란 갑자기 한 일을 잊어버리고 아무리 애써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사색을 지나치게 하여 심(心)이 상하면 혈(血)이 줄어들고 흩어져서 정신(神)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비(脾)가 상하면 위의 기능(胃氣)이 쇠약해지고 피곤해져서 생각이 더 깊어진다. 이 두 가지가 다 사람을 깜빡 잊어버리게 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생각이 너무 많거나 심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경우, 나이가 들면서 노화로 인하여 오장육부 등 장기와 심신의 기능이 떨어지고 신체가 허약해져 정신 작용이 약해진 경우, 몸 안의 체액이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제대로 순환하지 못한 경우(담음), 피가 몸 안의 일정한 곳에 머물러서 생기는 어혈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원인들을 살펴 경도인지장애 및 치매에 한방에서는 가미귀비탕, 조등산, 억간산과 같은 처방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귀비탕은 동의보감에서 “근심과 사색을 지나치게 하여 심장과 비장을 상하여 건망증과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한 것을 치료한다”고 하여 이전부터 건망증에 대표적으로 사용되어 온 처방이다. 최근 일본에서 시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가미귀비탕은 경증 및 중등도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 75명에서 MMSE 점수를 유의하게 호전시켜 인지 기능을 현저히 개선시킨다고 하였다. 또한 조등산과 억간산은 고혈압, 두통, 기분장애 등에 사용되는 처방으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등산을 12주간 복용한 군에서 여러 치매에서 나타나는 인지장애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수행과 섬망, 환각 등 치매와 관련된 행동, 정신 결함이 호전되었다.
강동경희대병원 중풍뇌질환센터의 박정미교수(한방내과)는 “치매 전단계인 경도인지장애의 증상으로 기억력 저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조기에 가미귀비탕, 조등산, 억간산과 같은 한약을 통해 치매로 진행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정미 교수는 한방의 침, 뜸 치료를 통해 기를 보하고 혈액 순환을 개선시켜 인지를 개선시키는 치료방법도 추천한다. 최근 뇌 f-MRI 연구에서는 침 치료가 인지와 기억에 관련된 전두엽, 측두엽 등의 해당 뇌 부위들을 활성화시킨다고 보고된 바도 있다.
그리고 고치법을 병행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고치법(叩齒法)은 치아를 서로 맞 두드린다는 의미로,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소리가 나게 서로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양생법이다. 어느 곳에서나 손쉽게 할 수 있으므로 매일 하면 좋다. 특히 나이가 들어 척추, 관절이 좋지 않거나 심장질환 등으로 운동을 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유용한 치매 예방법이다.
일상생활에선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경도인지장애 예방법으로 걷기 등 적절한 운동을 꾸준하게 하고 평소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며, 절주 및 금연과 책을 읽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등 머리 회전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 균형 잡힌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박정미교수는 “한국 노인 4명 중에 1명이 경도인지장애에 해당되는 만큼, 이제 이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와 관리가 요구되는 시점”이라며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정확한 검사와 진단이 필요하고 이에 더하여 한방의 도움을 받는다면 증상의 악화를 막고 건강한 노년을 보내는 데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며 강조했다.
◆ 경도인지장애 환자들 대상 일상생활 불편감 체크리스트
1. 은행 송금 금액, 아파트 번호키 등 숫자 관련된 일에 전에 없던 실수가 생긴다.
2. 바둑, 장기, 고스톱 등의 게임이나 일상적이던 이전 취미활동을 전처럼 잘하지 못한다.
3. 최근 일어난 일에 대해 빨리 생각이 나지 않는다.
4. TV 드라마나 책에서 보고 읽은 내용에 대해 이해가 잘 안 되어 엉뚱한 질문을 한다.
5. 집안 일, 업무 등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능력도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5. 가족 생일, 약 복용 등 지속적으로 해온 일을 깜빡 잊는다.
6. 운전 중 실수가 잦아지고, 지하철 환승 등 대중교통을 이용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검진이 필요함.
[이병문 의료전문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