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당 수억원을 호가하는 벤틀리의 디자인 총책임자는 토종 한국인이다. 벤틀리의 이상엽 선행 디자인 및 외관디자인 총괄디렉터(46)가 그 주인공이다. 이 디렉터는 홍익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GM·폭스바겐 등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를 거쳤다. 3년전 벤틀리로 옮긴뒤 제네바 모터쇼에서 극찬을 받은 ‘벤틀리 EXP 10 스포츠 6 컨셉카’와 지난 9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모습을 드러낸 벤틀리 최초의 SUV인 ‘벤테이가’의 디자인을 진두지휘했다.
지난달 중순 열린 벤틀리 행사 참석을 위해 방한한 이 디렉터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대중 브랜드와 럭셔리 브랜드에서 디자인 업무에 차이가 있는지를 묻자 “대중 브랜드는 모든걸 다 바꾸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호하고 럭셔리 브랜드는 전통을 이어가면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디자인을 원한다”고 말했다.
시간의 흐름에도 가치가 달라지지 않도록 디자인 단계부터 신경써야한다는 점도 럭셔리 브랜드의 특징이다. 그는 “럭셔리 브랜드의 디자인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품있게 보여야한다. 예를들어 벤틀리의 인테리어는 시간이 흘러 가죽이 갈라지고 색상이 변했을 때의 모습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벤틀리가 SUV인 벤테이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을때 자동차 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이 디렉터는 “벤틀리라는 브랜드가 SUV를 만드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회사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았지만 시류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SUV 시장에 뛰어들어야한다고 판단했다”며 “벤틀리 고객의 고급스런 취향을 만족시키면서도 SUV 특징을 담아낸 디자인을 목표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벤틀리의 경쟁 대상은 가구, 시계, 의류 등 모든 럭셔리 브랜드다. 이 디렉터는 “럭셔리 브랜드는 생산제품에 관계없이 트렌드를 선도해야한다”며 “명품 전시회 등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소재와 가공법, 디자인 기법 등을 끊임없이 고민한다”고 전했다.
한국에서도 벤틀리 같은 명품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을지 물었다. 이 디렉터는 “한국은 럭셔리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단언했다. 이어서 그는 “최근 벤틀리에 전자장치가 점차 많이 들어가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최근 럭셔리 시장의 추세는 ‘IT 기술’과의 결합”이라며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IT 기업들도 럭셔리 산업에 진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럭셔리 강국이 되기 위해 해결해야할 숙제 중 하나는 소비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스토리’라고 말했다. 스토리의 사례로는 직접 디자인한 ‘플라잉스퍼 코리아 에디션’을 들었다. 벤틀리가 한국 고객을 위해 단 두대만 제작한 이 차는 외관은 검정색으로, 인테리어는 오렌지색으로 치장한 ‘블랙 버젼’과 외부는 흰색, 내부는 청회색으로 꾸민 ‘화이트 버젼’으로 나뉜다.
이 디렉터는 “블랙 버젼은 겉에서 볼때는 점잖은 신사복이지만 안감은 오렌지색으로 포인트를 준 영국 정장에서 영감을 얻었고 화이트 버젼은 조선 백자와 고려 청장의 상감무늬에서 힌트를 얻었다”며 “이런 식의 스토리가 결합될 경우 한국 럭셔리 산업은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세단과 SUV, 스포츠카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량을 디자인해 본 이 디자이너는 디자인 작업을 하며 가장 즐거운 차는 ‘스포츠카’라고 말했다. 그는 “스포츠카는 효율성 등 신경쓸 필요없이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눈이 즐겁도록 디자인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작업이 즐겁다”고 말했다.
[김동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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