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 기업의 경영권 세습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설득할 것인가?’
행동주의 투자자가 삼성을 공격하기 훨씬 이전부터 재계는 이 화두를 고민해 왔다. 한국은 시가총액 상위 20개 기업(7월 22일 기준) 중 14개 기업이 경영권을 세습하고 있다. 한국 10대 그룹은 모두 상장돼 있고, 그 중에서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는 곳은 없다. 물론 경영권 승계에 따른 장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세습이 비단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에곤 젠더라는 컨설팅회사에 따르면 대만 기업 중에서는 75%가, 홍콩에서는 69% 기업들이 경영권을 직계존속들에게 물려준다. 존 데이비스 캠브릿지 어드바이저스 그룹 대표는 “그 나라에서 유명한 기업들이 경영권을 세습하는 행동은 아시아에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도 근로자의 60%가 가족기업에 고용돼 있다. 그랜트 웰시 KPMG 가업승계부문 대표에 따르면 경영권을 세습할 경우 기업은 ▲내부 단결 ▲과감한 결단 ▲장기적 사업계획 ▲충성심 높은 임직원 확보 ▲뛰어난 위기대응력 등의 장점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 기업 대부분이 경제 고성장기에 태동했고,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식시장에 자신들을 상장시켰다. 이 결정이 오늘날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상장을 통해 ‘기업을 공개’하는 행동은 ‘경영권을 대물림’하는 행동과 여러 맥락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불일치가 엘리엇의 삼성 공격 빌미를 제공한 틈새가 됐다.
홍콩 중문대학교의 조셉 판 교수가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위치한 기업 214개를 조사해 봤더니 가업 승계가 이뤄지고 난 뒤 8년이 지나자 상장된 주식가치가 평균 60% 하락한 상태였다고 한다. 랜들 칼록 인시아드 교수는 “가족은 서로를 보듬어 주기 위한 존재이지만 기업은 성과를 위해 존재한다”며 “둘 사이에는 불일치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 간극을 메우지 않으면 잘 물려줄 수도, 잘 물려받을 수도 없다. 더 비즈 타임스는 핀란드에서 성공적인 가업승계 기업으로 꼽히는 테크노스의 파울라 살라스티 CEO를 비롯해 랜들 칼록 인시아드 교수, 그랜트 웰시 KPMG 이사(가업승계 부문 대표), 존 데이비스 캠브릿지 어드바이저스 그룹 대표 등과 인터뷰를 통해 ‘가업을 잘 물려주는 법과 잘 물려받는 법’에 대해 들어봤다.
■잘 물려주는 법
가족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아들과 딸들에게 힘든 일을 주문하는 것이 바로 물려주는 사람이 할 일이다. 데이비스 대표는 “경영권 승계에 대한 따가운 시선은 아무리 해당 기업이 성과를 많이 내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며 “(성과와 관계없이) 승계자에 대한 시장의 인상 때문에 주가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잘 물려주려면 승계자를 도전적 사업에서 테스트를 시켜 준비가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 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그는 조언했다. 데이비스 대표는 “가족이 호화롭게만 살고 승계자가 출세가도만을 달린다면 상장기업의 주주들이나 일반인들은 회사에 재투자할 돈으로 일가족이 불공정하게 스스로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계자를 옥탑방에 머물게 하거나, 말단 청소부 일을 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일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칼록 교수는 가업을 잘 물려주려면 우선 형제·친척 간의 분쟁부터 불식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표했다. 내부가 분열돼 있는데 외부를 설득할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는 “창업자는 골퍼와 같지만 후세대는 농구선수와 같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창업자들은 자신만의 스킬을 활용해 스스로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형제간·친척간의 협업과 상호작용을 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 결국 가문 내에서의 분쟁거리를 해결하는 힘도 스포츠시합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인 ‘리더십’에서 나온다. 그는 그래서 “사람에 의존하는 리더십보다는 계획에 의한 리더십이 좋다”며 “그래야 형제들 사이의 기대도 미리 조정하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재편할 수 있으며 가족간 화합을 지킨다”고 말했다.
가문이 대대로 사회에 헌신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진정성 있는 작업들도 필요하다. 그랜트 웰시 KPMG 가업승계부문 대표는 “가업승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문과 비즈니스는 발달한 지 30년 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로 새로운 분야라서 대부분의 가업 소유주들이 (이해관계자들과 전체 사회의 관점을 아우르는) 포괄적 가업승계 계획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행동주의 투자자들도 경영권 승계가 갖는 장점을 알고 얼마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이해한다면 지금처럼 기업을 무모하게 공격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업가로서 수백년을 잇는 명문가를 만들려면 그 가문이 사회를 위해 헌신했음을 알릴 수 있는 실질적 ‘건수’와 ‘팩트’들이 축적돼 ‘명성’이 된다면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그 나라와 그 사회가 무서워서라도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잘 물려받는 법
칼록 교수는 물려받는 사람의 헌신이 중요한 덕목이라고 지적했다. “후계자가 소유만 하고 전문경영인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좋은 오너로서 헌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주주 가문이라도 주주들을 대표하는 주주로서 책임있는 경영자를 선발하고 기업의 가치를 지키며 큰 전략을 정하는 방향 제시를 한다면 사회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이해관계자와 주주들이 납득할만한 가치를 헌신적으로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일반 상장기업에서는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연봉을 희생하는 등의 행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가업을 잇는 후계자라면 뼈를 깎는 고통이더라도 지금 기업을 위해 가장 필요하지만 힘든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기업을 흔들어서도 안된다. 웰시 대표는 흔히 후계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빨리 입증해 보이고 싶어 섣부른 실험들을 하는 오류가 벌어진다고 말했다. 결과는 거의 좋지 않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미국 컨설팅 업체인 가족기업연구소(Family Business Institute)를 인용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가족기업이 2대까지 생존하는 비율은 전체의 30%, 3대까지 건재하는 장수기업 비율은 12%, 4대 이상까지 살아남는 초장수 기업 비율은 3%에 불과하다. 생존률이 떨어지는 원인 중 하나도 바로 이런 ‘후계자의 오류’ 때문이다. 웰시 대표는 “건전한 직업윤리를 가지고 (오너 일가족) 후계자의 건전한 판단을 도와줄 수 있는 이사회 구성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데이비스 대표도 “건전한 실적과 (일가족 구성원이 아닌) 신뢰감 있는 이사회 멤버를 꾸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기업의 리더가 주주들의 이익을 챙겨줄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장기적 실적 외에 없다. 그리고 장기 실적이 잘 나오려면 주주들의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시장에 이런 신뢰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좋은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데이비스 대표의 조언이다.
[김제림 기자 / 윤진호 기자 / 박창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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