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게 없다구요? 그게 바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디자인(Timeless Design)입니다.”
이달 초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서울모터쇼 기아차 전시장. 현대기아차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 총괄사장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나왔다. 이날 세계 최초로 공개된 신형 K5의 디자인 컨셉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가 신형 K5의 육각형 그릴부터 시작해 뒷바퀴까지 스케치를 모두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나왔다.
5년 만에 내놓은 신형 K5가 완전변경 모델치고는 너무 변화가 없는 게 아니냐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지적같기도 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그러나 “K5는 전작이 워낙 큰 성공을 거뒀고 상도 많이 받은 작품이기 때문에 신형 디자인에 심사숙고했다”며 “급격한 변화보다는 디자인 헤리티지를 유지·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고 밝혔다. 그는 “타이거 노우즈라고 불리는 기아차 고유의 그릴은 고속도로 반대편에서 운전하고 오더라도 이게 기아차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며 “BMW가 차를 만들때마다 고유의 그릴 모양을 포기하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그런 게 바로 디자인 DNA”라며 기자의 디자인 언어를 마저 설명했다.
지난 2006년 기아차에 발을 담근 피터 슈라이어 사장은 이제 현대기아차와 함께 한 10년 세월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새 환갑을 넘긴 그는 기아차에 들어오기 전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디자이너였지만 이제는 세계 시장에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슈라이어 사장이 과거에 아우디 TT를 디자인한 스타 디자이너라든지 5세대 골프를 디자인한 폭스바겐 디자이너로 기억됐다면 이제는 특정 모델이 아닌 기아차라는 브랜드와 동급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013년부터 기아뿐만 아니라 현대차 디자인도 맡게 돼면서 그에 대한 시장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가 기아차에서 보여준 ‘K카’마법을 기억하는 소비자라면 이번에 더 큰 기대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아의 K시리즈는 준중형 K3, 중형 K5, 준대형 K7, 대형 K9으로 라인업이 이뤄져있다. 해외에는 K2도 있다. K는 기아(KIA), 대한민국(KOREA), 강렬함과 지배 또는 통치를 뜻하는 그리스어 크라토스(KRATOS), 활동적인이란 뜻을 지닌 키네틱(KINETIC)의 앞 글자를 따왔다. 또 K시리즈에는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해 자동차 이름을 만드는 알파뉴메릭(ALPHANUMERIC) 방식도 도입됐다.
디자인 아이덴티티 통일이나 알파뉴메릭 작명법이 국산차에 없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K시리즈가 주목받는 이유는 슈라이어 사장이 기아차에 온 이후 제대로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로체 이노베이션에서 시작한 호랑이 코 그릴은 기아를 상징하는 디자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호랑이가 코를 찡긋할 때처럼 가운에가 살짝 눌려있는 이 디자인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기아차임을 알려주는 기아만의 아이덴티티가 됐다.
K7은 본격적으로 자동차 전체에 기아만의 정체성을 입혔다. K7을 시작으로 K5, K9, K3가 나오면서 기아의 아이덴티티는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기아의 디자인 경영과 맞물려 K시리즈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디자인을 보여줬다. 글로벌 시장에 기아의 브랜드를 확실이 각인시킨 것도, 수입차에 눈길을 주던 국내 소비자들을 기아차로 돌려놓은 것도 모두 K시리즈였다.
슈라이어 사장이 만든 K시리즈는 사실 디자인 뿐만 아니라 기아의 브랜드 정체성까지 통째로 바꿔놨다. K시리즈 이전의 기아를 떠올려보면 현대차와 차별화가 어려웠다. 오히려 현대차보다 디자인이나 품질은 한 수 아래라는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K시리즈의 성공은 이런 억울한 누명을 단번에 벗겨줬다. K시리즈 어딜 봐도 현대차와 닮은 점은 없고 오히려 기아만의 아이덴티티가 분명히 드러났다. 심지어 현대차보다 낫다는 평가도 상당했다.
K시리즈 첫 모델은 지난 2009년에 나온 K7이었다. 슈라이어 사장은 이 차를 언급하며 “K7이 처음 나온지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좋은 차”라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디자인(Timeless Design)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시장 반응도 그랬다. 사전 예약 3주만에 8000대가 계약되고 출시 이듬해인 2010년에는 현대 그랜저보다 판매가 앞서기도 했다. 뒤이어 출시된 K5도 국내 20~30대 소비자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놨다. 출시 한달만에 1만6000대 가량이 팔리면서 국내 중형차의 대명사 쏘나타를 앞질렀다.
그런 강력한 K시리즈가 이제 2기 디자인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정체성은 더욱 확고해졌고 프리미엄 이미지는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구형 K5가 기아차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세우는 데 애썼던 모델이라면 이제 신형 K5는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고스란이 물려받고 헤리티지(전통)을 쌓아가는 모델이 될 터다.
이제 다음은 현대 아반떼 차례다. 슈라이어 사장은 이미 신형 쏘나타와 제네시스에서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을 살짝 보여줬다. 이제 현대차에서 펼쳐질 그의 2세대 마법을 기대해본다.
[한예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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