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Black Hole)’에 1Gb(기가바이트) 영화 한 편이 담긴 CD와 조그만 돌맹이를 던진다고 가정해보자. CD와 돌맹이는 순식간에 블랙홀 저 편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블랙홀 속이 어떤 세상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블랙홀이 집어삼킨 돌의 질량과 CD에 수록돼 있던 정보(콘텐츠)가 어떻게 되었을 지 물리학적으로 상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CD와 돌맹이는 그저 사라지고 만 걸까.
학계는 이 문제를 ‘블랙홀 정보의 역설(Black Hole Information Paradox)’이라고 부른다.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질량이 보존되듯, 모든 에너지와 정보도 보존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블랙홀에서는 이 법칙이 성립하지 않다는 데 있다.
1974년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이 언젠가는 ‘소멸’ 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학계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빛조차도 빨아들이면서 거대한 질량을 갖고 있는 블랙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호킹은 이를 ‘호킹복사’로 설명했다. 블랙홀이 어떤 물체를 빨아들일 수 있는 한계선을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이 사건의 지평선 안쪽에 놓인 물체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밖에 놓인 물체는 블랙홀을 탈출할 수 있다. 지구는 물론 거대 행성인 목성도 사건 지평선 안에 놓인다면 순식간에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호킹은 사건의 지평선에서 벌어지는 진공상태에 주목했다. 진공상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 운동을 연구하는 ‘양자역학’에 따르면 진공 속에서는 물질과 반물질(反物質)이 끊임 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며 이 과정에서 빛과 같은 에너지가 발생한다. 참고로 우주를 이루는 물질은 자신과 반대 성격의 입자로 구성된 입자를 갖고 있는데, 이를 반물질이라고 한다.
문제는 사건의 지평선을 가운데에 두고 입자가 나뉘면서 물질과 반물질이 생겼을 때다. 남순건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는 “사건의 지평선 안쪽에서 생긴 반물질은 블랙홀로 빨려들어가지만, 밖에 생긴 물질은 블랙홀을 빠져나와 인간이 관측할 수 있다”며 “블랙홀로부터 빠져나온 에너지를 ‘호킹복사’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호킹에 따르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반입자는 블랙홀 내부 입자와 충돌해 소멸되며 에너지를 잃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블랙홀마저 소멸되고 만다.
기존 물리학 이론으로는 호킹의 주장을 설명할 길이 없다. 블랙홀이 갖고 있던 거대 질량과 정보가 사라진다는 것은 ‘질량보존의 법칙’과 같은 이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내놨다. 영화 ‘인터스텔라’ 자문 역할을 한 킵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는 정보가 손실된다고 주장했다. 호킹도 같은 의견이었다. 반면 같은 대학 존 프레스킬 교수는 손실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004년 호킹은 블랙홀에서 발생하는 여러 입자에는 ‘혼합된 정보’가 존재한다고 발표했다. 정보가 사라진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것이다. 다만 “그 정보는 불에 타고 남은 연기나 재처럼 어떤 정보가 담겼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CD와 돌맹이를 블랙홀에 던진 뒤 발생하는 입자를 분석해도 CD에 어떤 영화가 담겼는지, 혹은 돌맹이는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이같은 호킹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이 나왔다. 미국 버팔로대 이론물리학자인 데잔 스토이코비치 교수는 물리학저널 ‘피지컬 리뷰 레터스’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블랙홀에서 빠져 나오는 여러 입자간 상호작용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니 정보는 손실되지 않았다”며 “애초부터 정보 손실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홍서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정보는 빨려들어가지만 질량은 배출된다는 것이 호킹이 주장한 블랙홀 소멸의 핵심”이라며 “이 연구는 질량 외에 다른 것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이 이론이 맞다면, 지구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뒤에도 인간이 남긴 정보는 우주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을 지 모른다. 원호섭·[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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