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2006-2019`( 204 x 212 cm) [사진제공 = 가나아트센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1988년 프랑스 파리 유진에페메르 갤러리. 한국에서 온 31세 추상화가 안종대(62) 개인전에서 많은 작품들이 팔렸고 현지 언론과 경매사의 주목을 받았다. 1981년 파리국립미술학교로 유학온 지 7년 만에 거둔 성공이었다. 그러나 잔치가 끝난 후 공허감이 밀려왔다.최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작가는 "뭘 그리고 뭘 표현하고 뭘 자랑하는 것들이 다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내가 원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아름다움은 사실상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모든게 허무해져 그가 가진 캔버스와 물감을 버렸다. 기존 작품에 물을 뿌리거나 구겨넣으니까 비로서 아름다움이 뭔지 깨닫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을 너무 멀리서 찾았다. 물 자국와 녹(綠) 자국, 탈색 등 가까운 곳에 있더라. 새로운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고, 무엇이 정답인지 알게 됐다. 그렇다고 자연을 그대로 옮긴 것은 예술이 아니다. 어떻게 접목할까 신앙처럼 생각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아 성경을 외우다시피 했고 불경과 노자의 '도덕경'을 읽었다."
깊은 성찰 끝에 1989년 광목 천을 양철지붕에 널어놨다. 햇빛과 비, 눈이 배여들고 바람이 할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간, 2018-2019`(106 x 102 cm) [사진제공 = 가나아트센터]
"그렇게 시간과 빛을 채집했다. 그 위에 적절한 균형과 질서를 조화시키기 위해 깨진 그릇을 붙이거나 바느질을 한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사람이 없으면 원시 상태다. 작가의 손을 거쳐야 걸레와 예술작품이 구분된다."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을 담은 작품들을 개인전 'Le Temps(시간)'에 펼쳤다. 집 지붕이나 뒷들, 벌판에 천과 색지를 펼쳐놓고 오랜 세월 묵묵히 자연의 변화를 받아낸 '실상(實相)' 연작 23점이다.
작가는 "실상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곧 시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보는 대상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버려 실상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실상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우연이 인연이 되는 재료를 사용한다. 물감과 잉크, 커피, 고춧가루 등 자연스럽게 손에 잡힌 재료들로 작품을 물들인다.
"녹차 등 먹고 남은 물을 적시면 참 예쁘고 자연스럽다. 굳이 드로잉할 필요 없이 점만 찍어도 훌륭한 그림이 된다. 깨진 접시와 돌조각 등 모든게 소중한 자연의 한조각이다."
전시장 2층 천정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얼굴 조각들도 시간과 자연, 작가의 정성이 조화된 작품이다. 1981년부터 2008년까지 고구마와 아프리카 마, 감자, 모과 등 과일과 야채에 사람 얼굴을 새긴 조각들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라 비틀어져 늙은이를 연상시킨다.
염색한 한지 수백장을 겹겹이 놓은 설치 작품 역시 시간의 힘을 보여준다. 밖은 하얘지고 안에는 색이 남았다.
작가는 "모두 다른 색으로 태어났지만 빛 아래에서 언젠가 색이 바래져 순백이 된다. 빛에 정성, 기다림, 인내가 더해져 작품이 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했는데도 그의 작품은 동양화 같다. 외국에 가서야 비로서 한국이 보였다고.
"달에 가야 지구가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숭고한 동양정신을 서구적 논리와 방법론으로 풀어야 세계인 모두가 이해할 수 있다. 동서양 모든게 내 안에 있다." 전시는 7월 14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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