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가들을 빛의 화가들이라 부른다. 빛이 순간적으로 세상에 닿는 찰나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다. 그들이 빛을 색채로 표현하는 방식은 어쩌면 반 고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필자는 정택영에게 반 고흐의 외투를 입혀본다. 반 고흐는 인상파 작가들이 보지 못한 또 다른 빛을 보았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 순간부터 황금으로 물드는 저녁 오후까지 그는 세상을 관찰하며 그 풍경에 담긴 내면의 빛들을 그려냈다. 심지어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아를르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작품들이 그러했다.
정택영 작가가 그랬다. 사실 그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그의 회화 속에서 “빛”을 노래한 적이 없었다.
30대에는 회화의 빛나는 색채와 화면의 조형성에 치열하게 골몰 했고, 40대에는 파리로 도불 , 그야말로 에꼴 드 파리의 작가가 되면서 그는 비로소 서서히 “빛과 생명”이라는 명제 아래 그의 붓질에 인생을 걸었다. 그에게 파리로의 유학은 회화에 대한 근본정신과 세계를 송두리 째 바꾸게 된 인생에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그 시기에 그는 신앙심이 가득한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바뀌었고 거기서 그는 빛을 갈구했고 그의 화폭 속에 비로소 빛이 들어왔다.
미술의 역사에서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낭만주의 화가 윌리암 터너가 괴에테의 색채학에 매료 되면서 빛을 화폭에서 담아냈고, 네덜란드에선 렘브란트가 빛을 무기로 회화의 생명이 빛임을 세계에 알렸고, 더 실증적으로는 프랑스의 화가들이 터너의 영향으로 빛과 색채의 회화를 끌어들이면서 화구를 들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인상파 화가들을 탄생 시켰다.
이 후 도널드 쥬드나 바넷트 뉴먼이 네온 아트 등을 표현의 무기로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빛을 이용 했지만 정택영 작가가 갈구했던 그런 유형의 빛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정택영의 귀국전은 종종 있어 왔지만 그러나 이번처럼 그의 작품들이 명확하게 '빛과 생명'이란 주제 아래 전시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그의 이번 작품들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택영의 회화적 흐름에 패턴은 아마도 다음 사실에 기인한다.
하나는 개인적 삶의 변화와 파리 체류에 대한 인상이다. 그는 이 삶에 체험을 화폭에서 명증성 있게 보여주는데 , 그 가운데 하나는 공간속에서 절제된 색채와 형태의 단순화로 사물의 기호와 사인을 표현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빛과 생명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가독성이 있는 용어는 아니다.
그의 그림 속에 묻어나거나 파묻혀 있는 것이다. 그는 빛을 말하지만 일차원적인 빛은 아니다.
그에게 빛은 스스로 겪고 체험했던 인간의 삶속에 빛이다. 그것은 감정의 색채이자 작가가 단순화 시킨 조형적 요소의 재해석이다. 그 가시적인 그는 "빛의 언어로 그린 이들 작품의 이미지는 그 스펙트럼을 포착해 그것을 조형적 스펙트럼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는 모든 사물이 있다 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사물은 빛을 투과하면 반사하는 면, 흡수하는 면, 굴절시키는 면 등이 생기는데, 각각 다른 오묘함을 추상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한마디로 '빛과 생명체의 상관관계를 캔버스에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까요. 화면에는 현대 감각이 물씬 풍기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감성을 자극할 만한 독특한 색감을 표현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번 작품들에서 그의 번득임과 비전을 발견한다. 빛은 물리적·감성적 측면을 넘어 그는 조형적 예술가적 시각에서 그만의 언어를 찾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둠을 물리치는 힘을 ,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표면에 빛이 투과될 때 각각 고유한 물체의 언어로 변환돼 소리 없이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자 한다.
그는 현대인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주고, 존재에 대해 깊이 숙고해 주는 모멘텀을 전해주기 위해 이번에 '빛의 언어'라는 화두를 던진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이런 화두가 화폭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표출되길 요구한다.
마치 마크 로스코처럼 아니면 몬드리앙처럼 그가 발광하는 빛이 내면의 숭고한 조형과 감정의 정점에서 일어나는 정전기 같은 빛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림 속 빛의 진정한 가치는 작품이 감상자들에게 자신과 필연적 관계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나는 그의 빛의 이미지가 결합된 색면추상에 주목한다. 나는 이것이 형태와 조형, 색채의 절제를 통하여 현대회화로 생명의 근원을 지닌 형식으로 존재하는 일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2015년 이후 단순화한 사물의 상징적 해석을 통해 빛의 근원과 생명의 유기적 관계를 회화적 표현 방식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번 전시회에서 그런 변화는 더욱 성숙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있다. 아마도 이 작품들은 정택영 작가의 '빛을 담은 파리의 향기'로 불려질 것이다. 빛과 조형과 색채가 어우러져 하나의 축제의 장으로 펼쳐지는 정택영 작가의 엘도라도 같은 영토로서 말이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여기서 필자는 정택영에게 반 고흐의 외투를 입혀본다. 반 고흐는 인상파 작가들이 보지 못한 또 다른 빛을 보았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 순간부터 황금으로 물드는 저녁 오후까지 그는 세상을 관찰하며 그 풍경에 담긴 내면의 빛들을 그려냈다. 심지어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아를르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작품들이 그러했다.
정택영 작가가 그랬다. 사실 그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그의 회화 속에서 “빛”을 노래한 적이 없었다.
30대에는 회화의 빛나는 색채와 화면의 조형성에 치열하게 골몰 했고, 40대에는 파리로 도불 , 그야말로 에꼴 드 파리의 작가가 되면서 그는 비로소 서서히 “빛과 생명”이라는 명제 아래 그의 붓질에 인생을 걸었다. 그에게 파리로의 유학은 회화에 대한 근본정신과 세계를 송두리 째 바꾸게 된 인생에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그 시기에 그는 신앙심이 가득한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바뀌었고 거기서 그는 빛을 갈구했고 그의 화폭 속에 비로소 빛이 들어왔다.
미술의 역사에서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낭만주의 화가 윌리암 터너가 괴에테의 색채학에 매료 되면서 빛을 화폭에서 담아냈고, 네덜란드에선 렘브란트가 빛을 무기로 회화의 생명이 빛임을 세계에 알렸고, 더 실증적으로는 프랑스의 화가들이 터너의 영향으로 빛과 색채의 회화를 끌어들이면서 화구를 들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인상파 화가들을 탄생 시켰다.
이 후 도널드 쥬드나 바넷트 뉴먼이 네온 아트 등을 표현의 무기로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빛을 이용 했지만 정택영 작가가 갈구했던 그런 유형의 빛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정택영의 귀국전은 종종 있어 왔지만 그러나 이번처럼 그의 작품들이 명확하게 '빛과 생명'이란 주제 아래 전시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그의 이번 작품들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택영의 회화적 흐름에 패턴은 아마도 다음 사실에 기인한다.
하나는 개인적 삶의 변화와 파리 체류에 대한 인상이다. 그는 이 삶에 체험을 화폭에서 명증성 있게 보여주는데 , 그 가운데 하나는 공간속에서 절제된 색채와 형태의 단순화로 사물의 기호와 사인을 표현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 속에 묻어나거나 파묻혀 있는 것이다. 그는 빛을 말하지만 일차원적인 빛은 아니다.
그에게 빛은 스스로 겪고 체험했던 인간의 삶속에 빛이다. 그것은 감정의 색채이자 작가가 단순화 시킨 조형적 요소의 재해석이다. 그 가시적인 그는 "빛의 언어로 그린 이들 작품의 이미지는 그 스펙트럼을 포착해 그것을 조형적 스펙트럼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는 모든 사물이 있다 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사물은 빛을 투과하면 반사하는 면, 흡수하는 면, 굴절시키는 면 등이 생기는데, 각각 다른 오묘함을 추상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한마디로 '빛과 생명체의 상관관계를 캔버스에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까요. 화면에는 현대 감각이 물씬 풍기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감성을 자극할 만한 독특한 색감을 표현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번 작품들에서 그의 번득임과 비전을 발견한다. 빛은 물리적·감성적 측면을 넘어 그는 조형적 예술가적 시각에서 그만의 언어를 찾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둠을 물리치는 힘을 ,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표면에 빛이 투과될 때 각각 고유한 물체의 언어로 변환돼 소리 없이 말하고 있음“을 그리고자 한다.
그는 현대인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주고, 존재에 대해 깊이 숙고해 주는 모멘텀을 전해주기 위해 이번에 '빛의 언어'라는 화두를 던진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이런 화두가 화폭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표출되길 요구한다.
마치 마크 로스코처럼 아니면 몬드리앙처럼 그가 발광하는 빛이 내면의 숭고한 조형과 감정의 정점에서 일어나는 정전기 같은 빛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림 속 빛의 진정한 가치는 작품이 감상자들에게 자신과 필연적 관계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나는 그의 빛의 이미지가 결합된 색면추상에 주목한다. 나는 이것이 형태와 조형, 색채의 절제를 통하여 현대회화로 생명의 근원을 지닌 형식으로 존재하는 일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2015년 이후 단순화한 사물의 상징적 해석을 통해 빛의 근원과 생명의 유기적 관계를 회화적 표현 방식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이번 전시회에서 그런 변화는 더욱 성숙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있다. 아마도 이 작품들은 정택영 작가의 '빛을 담은 파리의 향기'로 불려질 것이다. 빛과 조형과 색채가 어우러져 하나의 축제의 장으로 펼쳐지는 정택영 작가의 엘도라도 같은 영토로서 말이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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