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에 있는 한 음식점에 가면 선비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음식점과 선비의 초상화. 어찌 보면 잘 어울리지 않을 듯한 조합이지만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고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풍석(楓石) 서유구다.
그는 조선 최고의 쉐프였다. 서유구가 저술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6지(志) 중 7권짜리 ‘정조지(鼎俎志)’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근대 이전에 쓰여진 최고의 요리서다. 식재료에 대한 총론, 밥 떡 엿 국수 만두 탕 한과 김치에서부터 조미료 제조법과 술 담그기까지 당시 존재했던 거의 모든 요리가 언급되어 있다. ‘정조지’는 훌륭한 레시피였다. 책에 나오는 요리들은 풍석이 직접 만들어보거나 맛을 본 것들이다.
“이곳 백성들은 고추만 따고 잎이나 줄기는 그냥 밭에 방치한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남초초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남초초는 고추의 잎과 줄기를 데쳐서 기름에 볶은 다음 갖은 양념으로 무쳐먹는 요리다. 어머니께서 남초초를 많이 먹으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하시니 누이들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서로 눈치보면서 먹던 생각이 난다.”
흥미롭다. 남초초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추잎 나물이다. 이 책 내용대로라면 전북 순창 지역에 고추잎 나물 요리를 퍼뜨린 사람이 바로 서유구다. 전라감사로 있던 1834년 구황작물이었던 고구마를 이 지역에 널리 보급한 것도 그였다.
서유구는 당대 최고 명문가인 대구 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서명응과 아버지 서호수는 영·정조 시절 핵심 집권층이었다. 그런데 이 집안의 가풍은 좀 독특했다. 다른 사대부 가문이 주자학에 몰입했던데 반해 서유구 가문은 수학 기하학 천문학 농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가문에서 성장한 서유구는 북학파 학자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실용학문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구하겠다는 뜻을 세운다.
“사대부가 고담(古談)만을 논하면서 오곡조차 구별할 줄 모르고, 쟁기와 보습과 가래를 구별할 줄 모른다. 어찌 농업을 일으켜 세우고 농민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당시 농업은 경제의 근간이었다. 서유구는 죽은 지식만을 섬기는 사대부의 말장난이 국가경제와 민생을 무너뜨리는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외국의 최신 지식을 구해 읽고 현장에서 그것들을 적용했다. 벼슬에 있을때나 관직에서 밀려났을때나 그의 고집은 변치 않았다. 그렇게 몰입한 30년의 결과물이 ‘임원경제지’다.
‘임원경제지’는 조선의 브리태니커라 할 만 하다. 총 113권, 16개 분야, 2만 8000개의 표제어로 이루어졌다. 애완동물 기르기부터 삼각함수까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농경사회의 지식이 집대성 되어 있다. 이 책을 위해 서유구는 900여종에 달하는 동아시아 서적들을 섭렵했고, 직접 밭에 들어가고, 물고기를 잡고, 집을 지었으며, 요리를 했다. 열정을 다해 살았건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 서릿발처럼 엄격했다. 죽기 직전 손자에게 “세월 낭비했으니 우람한 비석 세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사실 서유구는 천재성이나 업적에 비해 주목 받지 못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두 살 터울의 실학 선배였던 정약용의 그늘이 컸다.
정치적 개혁을 부르짖은 다산에 비해 실생활에 역점을 둔 그의 사상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안타깝다. 그는 죽기 직전 손자에게 “세월 낭비했으니 우람한 비석 세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서릿발처럼 엄격했다. 그는 죽기 직전 손자에게 “세월 낭비했으니 우람한 비석 세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서릿발처럼 엄격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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