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모인 저녁상. 어머니 홍매(손숙)의 재촉에 며느리는 ‘남행열차’ 한 자락을 뽑고, 너나없이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인다. 혹여나 들킬까 아버지(신구)는 극심해지는 통증을 숨기며 몰래 진통제를 주워 삼킨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비추던 조명이 거뭇해지며 무대는 암전(暗轉). 삶의 한 조각은 이처럼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찰나와 같다. 신구의 절절한 연기에 객석은 이내 눈물바다가 됐다.
연기인생 54년의 신구와 53년의 손숙. 두 노배우의 만남이 통했다. 9일 개막한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가 객석의 큰 호응을 얻으며 순항중이다. ‘살 냄새 나는 작품이다’ 는 심사 평을 받으며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이 연극은 두 배우의 연기로 2013년 초연된 작품. 초연 전회 매진 기록을 세우고 이듬해 앙코르 공연도 객석 점유율 84%를 기록한데 힘입어 세번째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는 간암 말기의 아버지를 지켜보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의 일상을 덤덤하게 묘사하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다. 무대에는 30여년 된 시골 기와집의 너른 마루가 놓여 있다. 볕 좋은 6월 말, 매실이 주렁주렁 달렸고 대추나무 꽃은 흐드러졌다.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시골로 돌아온 부부. 서울대를 나와 해외 법인장으로 나가 있는 장남은 보이지않고, 아버지의 강원도와 서울을 오가며 산 둘째 동하만이 어머니와 함께 곁을 지킨다. 옛집을 둘러보는 동하의 독백이 이어진다. “파란 매실 하나 따보고 냄새 맡아보고 대추나무 꽃 하나 둘 셋 세어보고 녹슨 삼발이 닦아보고 수돗물은 잘 나오는지 여전히 차가운지 손 한번 담가보고.”
반 백 년을 같이 살았어도 생의 마지막 순간엔 늙은 부부는 “당신에게 할 말이 많은데…”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작가 김광탁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극이다. 간암 말기의 아버지가 고통으로 인한 간성혼수 상태에서 ‘굿을 해달라’던 말에 충격을 받아 그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위한 위로의 굿 한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탈고했다고 한다.
“봐라 홍매야, 저기를 봐라. 이 집 지은 햇수 만큼 나이를 먹은 홍매를 봐라. 넘들이 청매가 좋다고 몸에 좋다고 헛소리를 해도 내는 저 나무를 심었다. 이 집 주인인 니 이름을 마당에 심은기라 붉은 빛이 도는 꽃이 그렇게 예쁠수가 없은게.”
마지막 순간에도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남은 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은 명장면이다. 아버지 신구와 어머니 역 손숙의 연기호흡은 명불허전. 2010년 ‘드라이빙 미스데이지’으로 처음 만나 ‘3월의 눈’ 등을 함께한 두 배우는 대사만이 아닌 눈빛과 몸짓까지 통하는 부부같은 호흡을 보여준다. 초연부터 함께 해온 연기파 배우 정승길과 서은경도 아들과 며느리 역으로 자리를 지킨다.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하지만 그래서 눈물샘을 더 자극하는 연극이다. 30년이 넘은 고단한 노동 끝에 두 자식과 마당 있는 집을 남기고, 가족의 울타리를 같았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쇠약해진 아버지를 등에 업은 아들의 눈물섞인 독백이 긴 잔상으로 남는다. “나는 좋네요. 언제 한번 아버지와 내가 살을 맞대고 홍매가 어떻고 달밤이 어떻고 고향이 어떤지 얘기해봤나. 나는 좋네요.”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02)577-1987
[김슬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