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차면 기운다”는 속담이 있다. 무엇이든 성하고 과하면 필연적으로 쇠한다는 얘기다. 한국 화단을 둘러봐도 과한 측면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중의 하나가 서구 현대미술에 대한 추종이자 쏠림 현상이다.
“한지에 먹으로 그린 수묵화는 팔리지 않는다”는 자조 아래 1000여년간 이어져 온 수묵화는 20여년 전부터 찬밥 신세다. 그러나 최근 화랑가나 미술관을 둘러보면 여기저기 수묵 전시가 잇따르고 있다. 단순한 우연인지, 무조건적인 서구 추종에 대한 반성이자 성찰인지 두고 볼 일이다. 특히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당대 수묵’전은 한국과 중국 한국화가 5명이 참여해 21세기 수묵화의 현주소와 미래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한국에선 김호득(65)과 김선두(57), 조환(57)이 참여했으며 중국에서는 장위(56)와 웨이칭지(44)가 새로운 수묵의 지평을 연다.
사실 ‘당대수묵’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전시지만 수묵화의 느낌을 주는 작품은 별로 없다. 이번 기획전이 먹과 한지라는 전통 재료와 기법, 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묵 운동을 펼치는 작가들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선(線)과 함축미, 본질을 추구하는 수묵 정신만 같지 나머지는 다 다르다고 해도 무방하다. 설치와 퍼포먼스,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장르가 전시장에 펼쳐진 이유다.
가장 연장자인 김호득은 참여 작가들 가운데 가장 전통에 충실하다. 그는 한지에서 벗어나 질기고 성긴 광목천과 캔버스천에 먹의 자취를 힘차게 긋는다. 붓을 놀리는 힘이 압도적이다. 작가는 “한국에서 수묵을 한다는 것은 절에 가서 절밥만 먹는 것과 같지만 전통 수묵도 아주 현대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먹을 고수한다는 데서 남다른 자신감이 느껴진다.
‘별을 보여드립니다-붉은땅’이라는 화려한 작품을 선보인 김선두는 오래 전부터 채색을 실험했다. 그는 역원근법과 콜라주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수묵에 다채로움을 입히고 있다. 작가는 “서양화가 면과 색(色) 중심이라면 동양화는 선(線)과 운필이 중요하다”며 “색을 다양하게 쓰고 있지만 결국 추구하는 것도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선”이라고 밝혔다.
‘먹의 대가’ 조환 역시 먹을 버리고 철판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전시에는 반야심경을 차용한 설치 작품 ‘무제’를 선보이는데 불교에서 극락정토로 가기 위해 타고 가는 ‘반야용선’을 연상시키는 배가 철판 작업 앞에 놓여 있다. 작가는 “수묵 정신은 먹에 있지 않다. 그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본질에 대한 탐구”라고 강조했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들은 어떻게 수묵을 변주하고 있을까. 40대 웨이칭지와 50대 장위는 각각 팝아트적이고 퍼포먼스적인 측면을 활용해 수묵의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웨이칭지의 작업에서는 별로 가득 찬 파라마운트 영화사 로고와 스포츠 상표 퓨마 로고, 할리우드 이미지 등이 등장한다. 연필과 금박과 같은 비(非) 수묵적인 재료를 통해 현실과 일상을 풍자한다. 장위는 붓 대신 자신의 손을 사용한다. 표면에 도장을 찍는 지문 행위를 반복한다. 개인 혹은 중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화적 행위다.
한국에 비해 중국은 전통 수묵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활발한 편이다. 문화적 자존심과 정체성 찾기에 나선 중국 정부가 6년 전부터 “수묵을 살려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내린 측면도 크다. 중국의 4대 천황으로 일컬어지는 쩡판즈와 장샤오강 등이 서구의 눈으로 스타가 된 데 대한 반작용도 있다. 중화권 컬렉터들도 현대미술이 주춤하자 대안으로 수묵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관측이다.
중국 상하이에 분점을 운영하는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는 “‘당대 수묵’이라는 기획전이 새로운 수묵의 담론을 펼치는 장이 됐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시리즈로 기획전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29일까지. (02)720-1524
[이향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