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근원을 탐구하는 '숯의 작가' 이배…"제 작업, 동양을 이해하는 코드 되길"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입력 2024-02-22 19:40 
이배 작가의 작업하는 모습 [사진=조현화랑]

"서양 사람들에게 추사(김정희)가 좋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이해할 만한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제가 하는 것이 동양을 이해하는 코드가 되면 좋겠습니다. 제 작품의 큰 배경이 되는 겸재(정선)나 추사는 쉽게 이해하지 않을까요? 제게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미술 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공식 부대행사로 선정된 개인전 '달집태우기'를 앞둔 이배 작가가 그제(20일)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열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풍속인 달집태우기를 주제로 개인전(오는 4월 20일~11월 24일, 베니스 빌모트 파운데이션)을 열기로 한 것도 우리나라 시골의 농경사회의 세리모니가 전 세계의 문화행사로 활용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경북 청도군 출신인 작가는 1990년부터 30여 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작가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절절하게 떠올린 것이 고향과 고국, 그리고 우리 문화입니다.

동양의 문화권과 밀접한 숯이 그의 예술 활동에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그렇게 '숯의 작가'로 불리게 된 이배 작가가 이번에는 달집태우기와 숯을 연계했습니다.


명실상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중견 화가로 자리매김한 이배 작가의 베니스 비엔날레 기획 의도와 숯을 활용한 작업 방식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근원에서부터 긴 여행…'달집태우기'와 '숯' 선보이는 이유

베니스 전시를 위해 이배 작가는 모레(24일) 청도에서 세계 곳곳에서 보내온 소원을 한지에 먹으로 옮겨 쓴 뒤 달집에 매달아 불을 붙일 계획입니다. 작가의 유년 시절, 정월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망을 품고 '달집태우기'를 했던 일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청도에서의 달집태우기를 준비하는 모습 [사진=조현화랑]

달집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활활 타오르다가 이튿날 숯만 남는 모든 과정이 촬영되어 오는 4월 전시장 입구에서 '버닝(burning)'이라는 영상으로 관객들을 맞을 예정입니다.

달집태우기를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요? 이 작가는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전의 주제가 '외국인은 어디에도 있다(foreigners everywhere)'인데 어쩌면 우리도 새로운 유랑인, 외국인이 아닐까 생각했다"며 "제 근원에서부터 긴 여행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달빛태우기 때문에 숯 작업을 한 작가는 아니고 우연히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숯을 통해 제 근원을 찾아가게 됐다"라면서도 "문화적인 감수성을 입히다 보니 숯 작업을 하게 된 것이 어릴 때부터 본 달집태우기에서 왔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숯 작업은 전시장 안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숯 조각들을 캔버스에 빽빽하게 놓고 접합한 뒤 표면을 연마한 평면 작업인 '불로부터(Issu de Feu)'와 청도에서 달집이 타고 남은 숯을 이용해 작업한 '붓질(Brushstroke)'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배 작가의 작품 Brushstroke A2 (2023년), Bronze 406 x155 x 175(h)cm [사진=조현화랑]

'붓질'은 일필휘지로 휘몰아치는 듯한 힘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진 설치 작업입니다.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지역의 친환경 제지를 한국의 전통 배접 방식으로 도배한 배경에 숯을 이용해 작업했습니다. 말 그대로 동양과 서양의 작업물을 통해 만난 것입니다.

높이 4.6m의 조각 '먹(2024)'은 숯의 그을음을 아교와 배합해 만드는 전통 먹을 형상화했습니다. 먹이 동북아시아 문화권를 상징하는 재료라 본 이 작가는 "영국 스톤헨지의 석상처럼 한국의 묵을 세우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전시장을 나올 때는 관객들이 지나갈 '달빛 통로'가 베니스 운하가 보이는 통로의 천장에 붙인 노란 셀로판으로 구현됐습니다. 작가의 어릴 적 과수원의 사과밭에서 본 풍경을 베니스에 가져가고 싶다는 바람이 구조물에 담겼습니다.

숯을 사용하는 이유?…"동북아 문화권의 정신에 가까워지고파"

'숯의 작가'는 동북아 문화권에 대해 깊이 고찰했습니다. 이 작가는 "동북아시아에 난초를 초록색으로 그리면 품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동북아시아의 발전한 문화라고 생각하고 거대한 수묵의 세계의 정신성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배 작가의 작품 Oblique (2022년), Charcoal ink on paper [사진=조현화랑]

우리 문화권 특유의 겸허한 영성을 담아내기 위해 이 작가는 최근 5가지 종류의 숯을 활용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소나무, 버드나무, 참나무와 딱딱한 박달나무의 숯을 사용하고, 프랑스에서는 포도나무 숯을 사용합니다.

작가의 바람은 간결한 색이 주는 감동, 그리고 동양에서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서양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의 바람대로, 수묵화와 고미술은 세계 미술시장에서 외면받는 현실 속에서도 그의 숯 작업만은 새로운 활로를 뚫은 듯 세계의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작가는 "제가 서양의 화가 세잔과 모네를 이해하는 것만큼 서양 사람들도 로컬리티(지역성)로만 생각하지 말고, 겸재를 이해하면 좋겠다"고 자신의 바람을 밝혔습니다.

"숯은 부유함과 풍부함 만드는 재료"

숯은 사실 조각하기 쉽지 않은 재료입니다. 때문에 서양에서는 숯이 연약하다는 느낌이 있고 타고난 뒤의 죽음이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동양 문화권에서 숯은 오히려 역동적으로 잘 살렸을 때 부유함과 풍부함이 생겨나도록 하는 재료라고 믿습니다.

그의 믿음이 공감을 얻은 듯 6.5m 높이의 숯 더미를 형상화한 조각 '불로부터'는 지난해 록펠러센터 채널가든에 전시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 미국 맨해튼의 심장부인 록펠러센터에 전시를 한 것은 이 작가가 처음입니다.
이배 작가의 '불로부터(Issue du feu)'가 록펠러센터 채널가든 앞에 전시된 모습 [사진=조현화랑]

이때를 회상하며 이 작가는 "견고한 돌이나 대리석, 철로 세웠다면 덜했을 텐데 숯을 세워 역동성을 느껴주신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미술관, 프랑스 파리 기메 박물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작가는 "예술가는 그 시대와 호흡할 수 있고, 그 시대의 중심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늘 깨어 있고자 노력한다"고 밝혔습니다.

오래된 전통을 현대와 잇는 작가 이배. "새로운 것을 하지 않으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계속될 발전을 예고했습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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