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여성 거장 브리짓 라일리(91)의 파스텔 빛깔 아카디아 작품이 한옥 기와 아래와 열린 창 사이로 색다른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한옥의 대표적 미감인 차경이 전시장 전면에 펼쳐졌다. 가까이서 작품을 보면서 몰입하는 경험도 흥미롭다.
라일리는 착시 현상을 이용해 리듬감과 조형미를 느끼게 하는 '옵아트'(Op art) 선구자로 196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여성 최초로 최고상을 받았다.
"나는 자연을 보고 그린다. 그 표현 방법이 매우 새롭긴 하지만, 내가 작업하는 대상은 자연이다."
인상파처럼 자연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의 작품세계가 자연친화적인 한옥과 조화를 이뤘다.
1973년 개관한 국민대 박물관이 국민대 명원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22일 문을 열면서 4명의 동시대 현대미술가와 함께 개관전 '시선, 비전의 예술가'을 선보였다.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해 재개관한 명원박물관은 전통 유물 외에 현대미술을 함께 소개할 계획으로 초대전을 기획한 것이다.
라일리는 1965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반응하는 눈'(Responsive Eye) 전시의 도록 표지로 사용된 흑백 판화 작품과 영국 내셔널 갤러리 벽에 설치됐던 작업 '메저 포 메저'(Measure for Measure)의 판화 등 대표작을 선보였다. 라일리처럼 인상파 전통과 이어지는 영국 작가 루크 엘위스(51)는 신작 '랜드마이어'연작을 통해 물의 표면과 빛의 움직임 등 순환 개념을 추상화한 작품을 시적으로 펼쳤다.
전시는 한옥이라는 전시 공간의 특성을 극대화하는데 신경 썼다. 라일리의 작품이 걸린 'ㅁ' 자 신관 한옥은 문을 모두 열어서 한옥의 중정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안에서 밖의 풍경을 보는 한옥의 미감인 차경이 반대로 바깥에서 작품 일부가 드러나면서 환상적이다. 또 한옥 손상을 막고자 작품을 거는 검은 가구같은 구조물도 따로 만들었다.
시선 비전의예술가 초대전 쌔미리 작품이 안채에 설치된 장면. <사진제공=슬리퍼스써밋>
기존 명원민속관에도 한국계 작가들의 현대미술 작품이 걸렸다. 안채 대청마루에는 한국계 캐나다 작가 쌔미 리(34)의 멀티미디어 영상 작품이 설치됐다. 가상세계에서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한 새들의 비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통적인 공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포털'(관문) 역할을 한다. 지난해 영국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중정에 설치된 커미션 수상 작품으로 이곳에서도 실시간으로 주변 날씨와 계절 등에 맞춰 화면과 새의 움직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한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는 빠키(Vakki) 작가는 우리 색동 보자기 패턴과 닮으면서도 기하학적인 평면작업과 입체 조각을 함께 선보여 전통 한옥과 조화를 이뤘다. 우리 이불 같은 빈백이 마당에 설치돼 앉거나 누워서 가을하늘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시선, 비전의예술가-빠키 설치장면 <사진제공=슬리퍼스써밋>
전시를 기획한 김승민 큐레이터는 "시선과 비전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공통점이 있는 작가 4명이 한옥이라는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살펴보는 전시여서 뜻깊다"고 밝혔다.명원박물관은 대학 내 한규설 고택을 이용한 명원민속관과 그 옆에 새로 지어진 한옥 형태의 신관, 지하로 이전한 기존 박물관을 아우르는 공간이다.
이 중 한규설 고택은 조선 말기 한성판윤과 의정부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 대감의 집으로,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1890년께 건축돼 서울 중구 장교동에 있다가 1980년 도시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쌍용 설립자인 성곡 김성곤의 부인인 명원 김미희 여사가 기증받아 국민대 대지에 이축해 차(茶) 문화를 보급하는 명원민속관으로 운영돼 왔다. 희소한 고문서와 암각화 탁본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달까지 정원과 카페 등 휴게공간도 추가로 갖춰질 예정이다.
전시는 11월 13일까지. 월요일 휴관. 관람은 무료지만 예약해야 한다. 명원박물관(02-909-4210)
시선비전의예술가 빠키 작품 전경 <사진제공=슬리퍼스써밋>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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