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성추행 피해자답지 않다'며 가해자에 무죄…대법 "잘못된 통념"
입력 2022-09-18 16:04  | 수정 2022-09-18 16:07
사진=연합뉴스
강제추행 혐의 무죄 선고한 원심 파기환송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 상정 안 돼…피해자마다 대처 양상 다를 수밖에"
"진술의 신빙성은 구체적인 상황 기초해 판단해야"

성추행 사건 전후 피해자의 태도가 의심스럽다며 피해자 진술을 부정한 하급심 판단에 대법원이 "잘못된 통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오늘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70)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에 돌려보냈다고 밝혔습니다.

1심 법원은 징역 1년 6개월 선고…항소심은 법원 "피해자라고 수긍하기 어렵다"며 무죄

A씨는 채팅앱으로 만난 피해자 B(30)씨를 모텔로 데려가 50만 원을 가방에 넣어준 뒤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A씨는 합의에 의한 신체접촉만 있었을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1심 법원은 B씨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인 점 등을 들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A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항소심 법원은 1심과 정반대의 판단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B씨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사건 발생 전후 B씨의 태도가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B씨가 모텔에 가기를 거부하지 않았고, 사건 이후에도 A씨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항소심이 "잘못된 통념에 따라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 두고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 진술의 합리성을 부정했다"며 "논리와 경험칙에 따른 증거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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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피해자 진술, 여러 정황상 신빙성 있어"

대법원은 피해자의 여러 정황상 진술의 신빙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고령의 피고인이 '춥다'며 모텔에 가자고 해 제안에 응한 것이라는 B씨의 진술에 대해 "피고인과 피해자의 나이 차이, 피해자의 심리 상태 등에 비춰 피해자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모텔에서 나와 함께 차를 탄 행위도 "갑작스레 심한 추행을 당해 극도로 당황하고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 상황이었다면, 피해자가 홀로 모텔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A씨의 차를 탄 점이 매우 이례적이라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은 B씨의 지능지수(IQ)가 72로 낮고 이 사건 무렵 사기를 당하는 등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점, B씨가 친구에게 피해사실을 알리면서 경찰 신고를 망설인 이유로 "B씨는 돈이 많아 경찰에 돈 써서 풀려날 것 같다"고 설명하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점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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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 대처 양상 다를 수밖에" 상세히 설시

판결문에는 성폭력 피해자가 처한 상황마다 대처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상세히 설시됐습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진 피해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가해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가해자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피해자가 일정 수준의 신체접촉을 용인했더라도 그 범위를 넘어서는 신체접촉을 거부할 수 있으며, 피해 상황에서 명확한 판단이나 즉각적인 대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지능이나 성정, 사회적 지위와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재판부는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가 다양한 대처 양상을 보이는 만큼 진술의 신빙성은 구체적인 상황에 기초해 판단해야 하고, 이러한 기준에 따라 B씨 진술의 신빙성은 인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성폭력 범죄의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피해자의 특정 반응들이 통상적일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설시해 성폭력 사건에서의 경험칙을 제시했다"고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안유정 디지털뉴스부 인턴기자 dbwjd55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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