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한(恨)과 함께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서다. 한과 다르게 긍정적인 이미지다. 간혹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긍정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정을 앞세워 한국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누비는 과자도 있다. '오리온 초코파이 정(情)'이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우연이 만들어낸 제품이다. 1970년대 초반 오리온 제품 연구원들은 당시 경제상황과 식생활 문화에 주목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이후 1970년대 들어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좀 더 고급스럽고 차별화된 과자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졌다.
오리온 연구원들은 1970년대 초 식품공업협회(현 식품산업협회) 주관으로 미국 등 선진국을 순회하다 한 카페테리아에서 우유와 함께 나온 초콜릿 코팅 과자를 맛봤다.
이 과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연구원들은 2년여에 걸친 실험과 개발을 통해 1974년 4월 초코파이를 선보였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현재 60여개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다. 실크로드처럼 '파이로드(Pie Road)'를 구축했다. 1년에 20억개 이상 팔린다.
보기만 해도 따스해지는 '정 CF'
[사진출처=오리온 CF]
오리온 초코파이가 '국민과자'로 자리잡은 데는 정(情) 광고가 한몫했다.오리온은 소비자가 원하고, 소비자가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광고를 고민했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two-way communication) 전략인 셈이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정'이다.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공감하는 정서다.
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스타급 모델을 쓰지 않고 보통 사람들의 공감하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광고를 제작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오리온 초코파이 '정' 캠페인 광고는 '이사 가는 날', '삼촌 군대 가는 날', '할머니 댁 방문' 등 현대인들이 잊고 지내던 정서인 가족 간의 '정', 이웃간의 '정'을 불러일으켰다.
'건널목 아저씨', '집배원 아저씨' 편 등 가족과 이웃 간의 정에서 사회적인 정으로 확대, 총 20여 편의 광고를 선보였다. '오리온 초코파이'하면 '정'을 떠올리게 됐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을 목적으로 '오리온 초코파이' 책걸상 교체 캠페인을 벌이며 2만여 조에 달하는 초등학교 책걸상을 교체했다.
초코파이 CF [사진출처=오리온 CF]
오리온 초코파이는 '정'의 매개체가 됐고 공산품 중 유일하게 인성(人性)을 가진 제품으로 인정받았다.덩달아 오리온 초코파이 매출액도 신장했다. 1989년 313억원이었던 매출액이 1990년엔 419억원, 1991년엔 455억원, 1992년엔 444억원으로 증가했다.
1998년 IMF 경제위기 당시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있을 때 '정' 소녀를 등장시켜 '둥근 정이 떴습니다'라는 광고 카피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2000년대 들어 '오리온 초코파이'는 신세대들의 '정'에 초점을 맞췄다. 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남녀 학생간의 '정', 연상연하 중고생들의 '우정'을 모티브로 광고를 전개했다.
2005년에는 오리온 초코파이 정을 영화로 옮겨 '말아톤', '웰컴투동막골'과 함께 문화마케팅을 전개했다.
드라마에서도 초코파이는 고마움을 말없이 전달하는 '신스틸러'로 종종 등장했다. 지난 2007년에는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치매에 걸린 '미스타 리'(신구 분)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으로 나왔다.
수목 드라마 1위를 차지한 '고맙습니다' 인기와 함께 오리온 초코파이 매출도 40% 가까이 증가했다.
한국의 정, 세계 문화코드로 만들다
베트남과 러시아에서도 국민과자 반열에 오른 초코파이 [사진출처=오리온]
오리온은 '정'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서도 성공했다. 해외에서 진행되는 광고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내 초코파이의 '정'과 같은 맥락이다오리온 관계자는 "오리온은 한국인의 감성코드이자 초코파이의 핵심 브랜드가치인 '정(情)'을 각 나라 사람들의 고유한 정서에 접목시키는 현지화 전략을 추진했다"며 "정의 세계화는 굳게 잠겨있던 세계시장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고 말했다.
오리온 초코파이를 가장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는 중국이다. 한국인에게 정(情)이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시하는 가치가 바로 인(仁)이다.
오리온은 이에 2008년 말부터 하오리요우파이(好麗友초코파이 중국명칭, 좋은 친구라는 의미) 포장지에 '인(仁)'을 넣었다.
초코파이에 인성을 불어넣으면서 공감대를 일으키자 중국 고객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국 다른 제품들의 매출 증대에도 크게 기여했다.
2016년 8월에는 차를 즐겨 마시는 중국인들의 특성에 맞춰 마차(찻잎을 곱게 갈아 가루를 내 물에 타 마시는 차로)맛을 담은 '초코파이 마차'를 출시했다.
베트남에서는 2009년부터 현지어로 정을 의미하는 'Tinh'이라는 단어를 활용한 마케팅 활동을 전개하면서 친근감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베트남도 한국처럼 제사상에 가장 귀한 것을 올리는 문화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오리온 초코파이는 제사상에 오를 정도다.
2017년 하반기에 선보인 신제품 '초코파이 다크'는 현지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며 초코파이 전체 매출을 끌어올렸다.
초코파이 다크는 진한 초콜릿 맛을 선호하는 베트남 소비자의 성향에 맞춰 빵 속에 카카오를 듬뿍 담은 제품이다.
올해 설 시즌에는 핑크빛 벚꽃을 내세운 화사한 디자인의 '초코파이 복숭아맛'을 선보여 비주얼을 중시하는 젊은층에게 인기를 얻었다..
러시아 대통령도 반했다
초코파이 종류 [사진출처=오리온]
러시아는 개인주의적인 서구화 문화가 보편적인데 반해, 티타임에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달콤한 초콜릿이나 케이크, 비스킷 등을 곁들이는 문화가 발달됐다.따스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성향과 관습을 파악한 오리온은 광고에서 여럿이 함께 초코파이를 나눠먹는 단란한 모습을 보여줬다.
2011년에는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이 차를 마시며 초코파이를 곁들이는 사진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대통령도 즐기는 간식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9년부터는 현지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베리 맛 초코파이를 출시해 호평받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이 '다차'(텃밭이 딸린 시골별장)에서 농사지은 베리류를 잼으로 만들어 먹는 것에 착안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신선함과 재미를 추구하는 젊은층 소비 트렌드에 발맞춰 색다른 시도도 시도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 시장에서 다양한 시즌 한정판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현지 문화와 입맛을 반영한 초코파이를 개발하며 글로벌 파이로드를 굳건히 다지면서 확장하고 있다.
[최기성 매경닷컴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