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벽화처럼 거친 질감 위에 용쓰며 그린…우리네 일상
입력 2022-01-24 17:20 
[국제갤러리] 문성식_세드엔딩

좀더 못그렸음 좋겠다.
미술계 아이돌로 통한다는 유망 작가가 내뱉은 바람은 뜻밖이었다. 그것도 국내 최연소(만 25세) 베니스 비엔날레 참여 경력의 작가 문성식(41)의 말이다.
그는 오랜 숙련으로 연마된, 기술적인 필력은 영 재미가 없어 아이가 그린 것만 같은 우둔한 선을 찾고 있었다. 딱 미국 여성 작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스케치 선처럼.
리얼리티(현실성)가 살아있지만 작가적 해석이 더해져 어그러지는 그런 형상을 추구한다. 본인이 목욕시켜드렸던 할아버지의 몸은 사진도 남아있지 않아 상상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과수원집 가족의 소소한 일상과 주름가득한 어머니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문성식의 개인전 'Life 삶'전이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2월28일까지 열린다.
[국제갤러리] 문성식_겨울나무
이번에는 지난 2019년 국제갤러리 서울관에서 처음 선보였던 유화 드로잉 신작들을 소품들 위주로 100여점이 출품됐다. 대형 장미 연작 '그냥 삶'의 신작과 지난해 전남 수묵 비엔날레에 선보인 '그저 그런 풍경: 땅의 모습' 연작 중 10여 점도 포함됐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이 있는 망미동 복합문화공간 F1963에서 만난 문 작가는 "2019년 서울 개인전 때는 새로운 시리즈(연작)을 시작해서 익숙하지 않은, 버벅거림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놀아보자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밝혔다.
문성식은 원근법과 같은 서구 회화의 논리를 거부하려는 노력으로 사소하고 별것 아닌 듯한 대상이나 풍경을 새롭게 표현하는 독자적인 미술 언어를 정립해 주목되는 작가다. 특히 회화와 드로잉의 구분을 없앤 유화 드로잉은 이번 개인전에서 좀더 원숙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박수근 회화속 돌가루 같은 거친 질감과 이왈종 회화에서 느껴지는 인간적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언뜻 보면 낙서처럼 휘갈긴 그림이다. 하지만 매끄러운 종이 위에 쉽게 연필로 그리면 될 것을 진흙바닥 같은 바탕을 만들고 '용쓰듯' 힘겹게 그리는 행위를 굳이 택한다. 그는 지난 2013년 두산레지던시 뉴욕 입주작가 때 접했던 이탈리아 벽화 이미지가 머리에 맴돌면서 과거 인간의 에너지가 파괴된 모습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국제갤러리] 문성식_정원과 두 남자
실제 작업 과정은 캔버스에 종이죽을 발라 돌 질감처럼 표면을 그슬그슬한 사포 같은 상태로 만든 다음 유화를 올리고 연필로 긁고 건조시킨다. 반건조 상태에서 칼로 긁어 스크래치를 내고 다시 건조시킨 후 젯소(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흰색 재료로, 물감의 접착력을 높여준다)를 바르기도 한다. 채색화는 아크릴과슈로 표현한다. 작품이 마르는 시간 때문에 보통 3개 정도 작품을 동시에 작업해 일주일 가량 걸린다고 한다.
문 작가는 "호기심이야말로 내가 그림을 그리는 추동력이 된다"며 "(내 그림 속에서) 서정과 리얼 다큐적인 느낌이 교차되는 것을 즐기는데 앞으로 다큐 비중이 더 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산 달맞이고개에서 거주하는 작가가 포착한 일상 풍경은 쉽게 공감된다. 부동산 중개업자와 집을 보기 위해 찾아간 중년들 모습을 담은 2021년 작품 '협상'은 흥미롭다. 인간에게 주거는 생존의 핵심 문제이지만 자기욕망의 끝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신이 이런 인간의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그림 밑바닥 귀퉁이에 깔리듯 인간군상을 배치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찬란한 계절에 헤어지는 남녀를 그림 귀퉁이에 밀어넣은 2021년 작품 '세드 엔딩'도 그러하다.
[국제갤러리] 문성식_정원과 나
전남 수묵 비엔날레에 선보인 '그저 그런 풍경: 땅의 모습' 연작은 산수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방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가는 "폭포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그림을 너무 좋아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서도 영감을 얻어 작품에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현대화가 중에서는 박수근의 공예적인 선과 이중섭의 동적인 선도 연구대상으로 삼아 자기 것으로 표현하려고 애쓴다고 했다.
[국제갤러리] 문성식_가을 정원
이번 전시에 유달리 소품이 많았던 것에 대해서 작가는 본인이 휘두르는 호흡의 상태와 기법이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고 답했다.
문성식 작가는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수학했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해 주목받았고 체코 프라하 비엔날레(2009년), 독일 보훔미술관(2010년), 대구미술관(2017년), 아르코미술관(2021년) 등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리움미술관과 두산아트센터 등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문성식_정원과 가족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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