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물화 대가 도상봉 손녀의 강렬한 그림 "역시 피는 못속여"
입력 2022-01-18 08:32 
갤러리현대_도윤희_작가사진 (2)

쉰을 앞두고 이방인이 되기로 했다.
화가 도윤희가 갤러리현대에서 7년 만에 펼친 개인전 '베를린'은 자유로운 몸짓이 만든 화려한 색채의 향연으로 넘실거렸다.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 만난 도윤희 작가는 "마치 소리가 음표 사이에서 나오듯 색깔 사이에서 부딪히며 나오는 감정을 에너지화하고 그림 속에 물질감으로 형상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적 자아의 생각과 감정을 그림이라는 물질로 만드는 과정인데, 이번에는 물감 덩어리에서 오는 탄력과 질감, 리듬이 추가돼 현실과 내면을 직관적으로 터뜨렸다"고 설명했다.
갤러리현대_도윤희_작가
실제로 작가는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음악연주나 댄스 공연을 쉽게 접하면서 그런 율동감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단다. 2층에 걸린, 특히 화려한 보라 빛깔이 돋보이는 작품의 경우 '사탄의 탱고'같은 양립된 개념들이 시적 표현처럼 충돌되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고 한다.
도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 왔다.
그는 "기도를 딱 하나만 한다면 변화를 가질수있는 욕망(desire)을 계속 품게 해달라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다.
색을 많이 쓰던 그는 2010년대 초반엔 연필과 흑연, 바니시(도막형성을 위해 사용하는 도료)를 이용해 세포의 원형이나 화석의 일부 같은 이미지를 섬세하게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지난 2015년 개인전 '나이트 블로썸'에서는 야간에 꽃이 핀듯 부드럽고 아름다운 추상으로 색채 실험을 본격화했다.
5. Untitled 무제, 2021, Oil on canvas 캔버스에 유채, 145 x 110.5 cm
또 이전 까지는 시 구절을 연상시키는 문학적인 제목이 작품마다 달려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제목이 모두 'Untitled(무제)'다.
그는 추상성이 심화된 만큼 관람객들이 마음껏 그림 자체로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도 열어놓았다고 한다. 관람객이 느끼는 반응이라면 어떤 것이면 신선하게 받아들이며 소통의 상호작용을 즐기는 듯 보였다.
1세대 서양화가이자 정물화 대가인 도상봉의 손녀라는 그늘이 부담이 됐을까.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아 활약해왔던 도 작가는 나이 오십을 맞아 변화가 더 절실했다.
뉴욕과 파리에서 차마고도, 사막까지 돌아다니다가 2012년 베를린 동쪽 공장지대 작업실을 마련하고 안착했다. 지난해까지 약 7번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한 결과물이 이번 개인전이다.
도 작가는 "90년대 방문했을때는 그저 거친 느낌뿐이었는데 다시 방문하니 제2의 고향처럼 나를 편하게 해주고, 나를 알게 해준 도시였다"며 "무겁게 깔려 있지만 심오한 아름다움, 오래 지속해 봐야 발견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았다"고 말했다.
10. Untitled 무제, 2021, Oil on canvas 캔버스에 유채, 53.2 x 45.7 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실제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베를린에서 최대한 단순화된 삶으로 집과 작업실만 왕래했다. 트램을 타고 이동하면서 발견한 길거리 색깔이나 그림자의 움직임, 비맞은 강물, 겨울 광고판 등 일상속 자극을 틈틈이 휴대폰 드로잉으로 담고 그 조각들을 모아 거대한 유화로 완성해 나갔다.
일견 꽃무더기처럼 느껴지는 그림이 작가 본인 내면의 복잡한 심경을 시궁창 느낌으로 표현했다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밝다. 작가 본인이 탐구했던 내면 속 우울한 자아가 보석같은 밝음을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인정받는 화가라는 기득권을 다 포기하고 얻은 베를린 작업실에서는 자연광이 있는 시간에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태양의 시계에 맞추다 보니 늦잠자던 버릇도 버리고 명상후 8시면 작업하는 규칙적 생활이 필수였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색채는 인상파 화가들 그림처럼 빛을 머금은 느낌이다.
7. Untitled 무제, 2018-2021, Oil on canvas 캔버스에 유채, 162 x 130.5 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번 전시에서는 붓 대신 손으로 작업한 흔적도 보인다. 온 몸을 던져 작업을 하다 보니 어떤 작품은 아예 손가락이 캔버스를 뚫어버리기도 했다. 검정색인줄 알았던 둥근 부분이 뚫려 더 흥미롭다. 3년 가까이 오래 씨름했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도 작가는 "장갑을 끼고 작업했는데도 지문이 다 닳아 지문인식이 힘들 정도다"고 토로했다.
전시장 1층에 베를린시절 작품들이 주로 있고, 2층에 서울에서 그린 작품들이라 비교해서 볼 만도 하다. 또 일부 작품들은 세로 200㎝×가로 150㎝ 대형 캔버스가 바닥에 가깝게 걸려 작가가 작업하는 시선과 관람객 눈높이를 맞춘 방식도 흥미롭다.
2. Untitled 무제, 2017-2019, Oil on canvas 캔버스에 유채, 200 x 150 cm
도윤희 작가는 "추상화는 환상이나 상상이 아니라 나의 인식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작업하는 것이 세상과 화해하는 것만 같다"고 밝혔다.
전시는 2월27일까지 열린다.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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