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에 / 나의 이름은 / 낯설은 얼굴들 중에서 / 말을 잊어버린 <벙어리 아이>였습니다. (중략) 결국은 / 생활이란 굴레에서 / 아주 조그마한 채 / 이름마저 잃어버린 <이름없는 아이>랍니다.'
추상화가 최욱경(1940~1985) 시 '낯설은 얼굴들처럼'(1972년)이다. 그의 대규모 회고전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가 자작시와 작품을 함께 풀어가는 방식으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내년 2월 13일까지 열린다.
전시 제목은 그의 자작시 '앨리스의 고양이'에서 따왔으며, 동시대 현대미술과 문학의 관계를 통해 다각도로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45세에 요절한 비극적 여성 작가의 틀에 갇혔던 그를, 루이스 캐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년)처럼 낯선 시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갔던 미술가이자 시인, 교육자로서 능동적 주체로 재해석했다.
출판사를 운영하던 부친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과 친숙했던 그는 '어머니는 자수로 호흡한다' 등 서술적 제목으로 차별화했고 1972년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욱경의 1968년 작품 `In Peace(평화)`, Ink on Paper, 81×135.5(×2)㎝, Private Collection.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는 '미국이라는 원더랜드를 향하여'(1963~1970)', '한국과 미국,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1971~1978), '한국의 산과 섬, 그림의 고향으로'(1979~1985) 주제 공간을 연대기별로 보여주고, 마지막 '에필로그. 거울의 방: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작가의 작업공간과 자화상을 조명하며 마무리한다.첫번째 방은 미국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 정체성을 탐색하면서 추상표현주의 등 미국 동시대 미술을 폭넓게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100주년을 맞아 활발하게 재조명되던 시기 '뿌리가 흔들리는 충격'이었던 유학 경험이 정체성 혼란을 겪던 앨리스와 쉽게 공감됐던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최욱경 회고전 전경.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고 있는 최욱경 회고전 전경.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두번째 방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구상과 추상이 결합된 독자적인 추상미술을 제작한 시기를 펼친다. 특히 뉴멕시코 로스웰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꽃과 산, 새를 떠올리게 하는 유기적 형태들이 뒤얽혀 날아오르는 듯 생명력 넘치는 대작(200호 규모)을 완성하며 주요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원색의 강렬한 대비와 표현적 기법이 두드러졌다.최욱경의 1984년작품 `Mountains Floating Like Islands(섬들처럼 떠있는 산들)`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최욱경의 1981년 작품 `Mt. Gyeongsan(경산 산)`.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세번째 방에는 1979년 귀국후 영남대와 덕성여대 교수 재직시절 한국의 산과 섬의 조형성을 탐구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 시기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했다. 전시를 다 보고 나면 20여년간 얼마나 기법과 재료, 주제 등에 변화가 컸었는지 확인하고 감탄하게 된다.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최욱경은 선이 굵은 회화작품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혔다"며 "미공개 작품 10여점 등도 첫선을 보여 최욱경 미술의 원형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유신 학예연구사는 "최욱경은 당시 '규수 화가'로 분류됐고 '최대 그림을 그린 조그마한 아가씨'정도로 화제가 됐다"며 "전시 자료를 보니 여자대학 교수로서 여성의 미술교육과 사회 진출에 대한 견해를 적극 드러낸 점에서 페미니스트 대표 작가 주디 시카고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최욱경은 국내 여성화가 대표격인 박래현 선생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서울예고와 서울대 재학 시절에도 재능이 빛났다. 큰 오빠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던(국내 1호 하버드대 박사) 터라 미국 크랜브룩 아카데미 유학도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막내 여동생 최주경씨는 "아버님이 특히 욱경 언니를 이뻐하셔서 출장 때마다 물감을 잔뜩 사다주셨다"며 "참신한 전시 기획으로 언니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 기쁘다"고 전했다.
유족들의 정성어린 관리 덕에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도 선보였다. 전시 개막일 전시장을 찾은 유족들은 새롭게 발굴한 작품들의 전시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최욱경이 세상을 떠난 후 2년이 지난 1987년 대규모 전시가 열렸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이어서 감회가 남달랐다.
최욱경 자화상 연작 '계속되는 나와 나의 생각들'(1976) 모눈종이에 연필 200×91㎝ 뮤지엄 산 소장.
그는 최근 전세계 여성화가 106명을 선정한 '여성 추상화가전(Women in Abstraction)'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작품을 걸었다. 올해 상반기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 이어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전시중이며, 프랑스 출신 세계적 조각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해 눈길을 끈다.[이한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