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집값 고공행진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주택공급 부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대규모 사전청약 카드를 꺼냈다. 사전청약을 확대해 10만1000가구를 예정보다 당겨 공급한다는 게 주요골자다. 2024년 상반기까지 공공택지 내 민간분양 부지(8만7000가구)와 3080 도심 공공주택복합개발사업(1만4000가구)의 공급 물량을 1~3년 앞당겨 올 하반기부터 사전청약 방식으로 공급한다.
공급 확대 발표 직후 부동산 전문가들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민간의 참여도와 공급계획 전반의 현실화 여부에는 의구심을 보였다. 무주택 실수요자들도 정부 발표에 반신반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전청약을 확대한다고 해서 당장 공급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기 수요만 증가해 희망고문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지난 25일 부동산관계장관회의를 통해 신규택지 등에서 조성되는 민간주택 등 10만1000가구를 사전청약 방식으로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공공분양에만 적용해 온 사전 청약을 인천 계양, 경기 고양 창릉 등 공공택지 내 민간 아파트와 도심 고밀개발 사업으로 확대키로 했다. 올 하반기부터 2024년 상반기까지 아파트 사전 청약 물량은 종전 6만2000가구에서 16만3000가구로 증가한다.
윤성원 국토부 1차관은 전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위클리 주택공급 브리핑'에서 "풍부한 유동성과 저금리 등의 거시경제 여건 속에서 규제완화와 가격상승에 대한 기대가 더해지면서 주택에 대한 미래수요가 현재로 앞당겨져 지금의 가격 상승세로 이어지고 있다"며 진단했다.
윤 차관은 이어 "코로나19 위기대응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의 자산시장 과열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이미 발표한 공급 대책들을 차질 없이 이행하는 한편 국민들이 공급효과를 조기에 체감하실 수 있도록 사전청약 등을 통해 공급시점을 최대한 앞당겨 불안 심리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청약 시기를 당겨 무주택자의 불안감을 줄이려는 취지지만, 신규 공급 물량은 그대로여서 시장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신규택지를 지정해도,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등 2·4 대책 신사업을 벌여도 이를 통해 주택이 공급되는 것은 수년이 훌쩍 지난 뒤라 당장 치솟는 집값 잡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민간사업에도 사전청약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기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면서도 "도심 공공주택복합사업은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소송과 사업 지연 등 변수도 있다"며 "유연한 사전청약이 가능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 사전청약 내년 하반기 몰려…전월세시장 불안 지속 전망
태릉CC 전경 [매경DB]
서울의 경우 가장 빠른 1만9000가구의 사전청약이 모두 내년 하반기에 몰려 있다. 공급물량이 부족한 서울에서 실수요자는 내년 하반기 사전청약 이후에도 2~3년간 임대차 시장에 묶일 수 밖에 없다. 전월세시장의 불안을 여전히 부추기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다만, 과천과 태릉의 공공택지 사업은 주민의견을 수렴해 공급정책의 걸림돌을 해소했다는 점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정성진 어반에셋매니지먼트 대표는 "정부가 줄곧 공공택지의 최초 발표물량과 입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지자체와의 갈등이 심했는데, 지난 6월 과천시가 제안한 대체물량이 사실상 최초로 수용되면서 다른 공공택지 사업도 협상의 폭이 넓어졌다"면서 "대체물량을 수용하면서 과천물량은 4000가구에서 4300가구로, 태릉골프장 부지는 1만 가구의 고밀구조를 해소하고, 인근지역으로 3100가구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태릉골프장 부지에 조성 예정인 아파트 규모를 당초 1만 가구에서 6800가구로 축소했다. 이 부지는 작년 8·4대책에서 발표한 신규 택지 18곳 중 주택 공급 물량이 가장 많은 곳이었지만, 주민들의 개발 계획 반대에 부딪혀 원래 계획의 3분의 2 수준으로 줄인 것이다. 대신 노원구의 다른 정비사업으로 3100가구를 공급하고 9000가구의 신규 택지를 추가 조성하겠다고 정부는 발표했다. 하지만 이날 노원구가 "교통 대책 없이는 협조하지 않겠다"고 반발하면서 정부 계획대로 추진될지는 알 수 없다.
부동산 온라인 카페 등에는 "사전 청약 물량 확대가 무주택 실수요자에겐 '희망 고문'이 될 것"이란 의견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30대 직장인 A씨는 "정부가 주택공급 확대 발표는 본청약 이전의 과정인데 예전의 보금자리주택이나 3기 신도시 토지수용 과정을 지켜보면 예상보다 사업 기간이 길어길게 뻔해 보인다. 괜한 발표로 '전셋값'만 들쑤실 것 같다"고 우려했다.
40대 B씨는 "무주택자가 사전청약을 받기 위해 집을 사지 않고 전·월세 시장에 계속 머무르면 전·월세 수요 증가로 이어질 수 것"이라며 "이미 택지가 조성된 곳은 2025년 입주가 가능하지만 도심 고밀개발 사업지는 사전청약 이후 본청약을 거쳐 실제 입주에 이르기까지 7, 8년 걸릴 수 있다"며 당장의 집값 안정에는 한계가 있고 임대시장 불안만 가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신규 사전청약 물량 상당수(8만7000가구)는 공공택지 내 민간분양 아파트에서 나온다. 3기 신도시인 인천 계양, 경기 부천 대장, 고양 창릉, 남양주 왕숙1·2, 하남 교산이 사전청약 대상이다. 경기 파주 운정신도시, 평택 고덕신도시, 인천 검단신도시 등 공공택지를 민간에 매각할 경우 6개월 내 사전청약을 시행해야 한다. 아울러 이미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부지의 경우 사전청약 참여 시 향후 택지를 우선 공급하는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민간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나머지 사전청약 물량 1만4000가구는 도심 고밀개발 사업에서 나온다. 사업지에 새로 짓는 아파트 중 기존 소유주 몫과 공공임대 등을 뺀 일반분양 물량을 미리 공급하는 방식이다. 현재 도심 고밀개발 사업이 추진 중인 후보지 56곳 중 13곳이 주민 동의율 3분의 2 이상이라는 지구지정 요건을 충족한 상태다. 이 지역에서 내년 하반기 4000가구의 사전청약 물량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민간분양 아파트와 도심 고밀개발에서 공급되는 사전청약에 당첨되면 다른 청약에 참여할 수 없다. 당첨자 지위는 포기할 수 있지만, 정부는 사전청약 당첨 시 청약통장을 사용한 것으로 간주하고, 당첨자의 지위를 유지하는 한 해당 청약통장으로 다른 본청약 참여를 제한키로 했다.
한국부동산원은 사전청약 대상입지, 입지별 사전청약 예상일정, 예상물량 등을 취합해 청약홈에 공개한다. 민간시행 사전청약 예정 사업의 추진일정을 관리하면서 예비입주자 모집 승인이 나면 관련 내용을 즉시 청약홈을 통해 알릴 예정이다.
[조성신 매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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