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중국 일본 전통종이는 유네스코 유산, 한지는 왜 안 됐나?
입력 2021-05-19 11:38  | 수정 2021-05-19 13:04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2021. 5. 12. <한주형기자>

70대 한지장의 허리가 꼬부라져 있었다. 닥나무 껍질을 일일이 손으로 벗겨내고 쪄서 찬 물풀에 흔드는 등 100번의 공정을 거쳐 한지를 만드는데 평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은 3년전 처음 찾은 경북 문경 한지 공방에서 가슴이 뭉클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들 며느리까지 가세해 정성껏 만든 한지는 하나의 예술품이나 다름 없었다. 비단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최근 서울 마포구 집무실에서 만난 이 전 총장은 "눈물겹도록 힘든 수공예 작업에서 진정성을 발견했다"며 "그들은 한지의 수명 1000년을 위해 모든걸 바치는 장인들이었다"고 말했다.
장인들의 '피땀눈물'에도 한지가 실생활에서 점점 멀어지는게 안타까웠다. 세계가 자연친화적이고 독창적인 한지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운명'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는 지난달 전통 한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추진단을 출범시켰다. 이미 우리나라 사찰 7곳과 서원 9곳을 유네스코 인류유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경험과 추진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출범식에서 전통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지 장인들에게 꽃다발을 안기면서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중국 전통종이 선지는 이미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일본 화지는 2014년 등재됐어요. 빠르면 2024년이나 2026년에 한지를 등재시키려면 지금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서원 9곳이 2011년 추진단 발족 후 2019년 유네스코 등재까지 8년이나 걸렸다. 그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체계적으로 예산을 지원하고 한지 장인과 전문 학자 등이 합심하고 인내와 열정을 쏟아내야 가능하다"며 "나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주 한지 공방을 방문한 이배용 전 총장
다행히 세계 곳곳에서 한지 가치를 알아주는 사례가 늘고 있어 '청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 보존복원 중앙연구소가 전북 전주와 경남 의령 공방이 만든 한지를 보존·복원 용지로 인정했다. 문경 한지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존·복원 용지로 사용되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면 신뢰가 생겨 한지가 더 많이 쓰일 겁니다. 관련 산업이 성장해야 젊은이들이 가업을 잇고 명맥이 끊어지지 않아요. 전통은 한 번 끊어지면 돈을 써도 복원을 못하죠. 좋은 토양에서 자란 닥나무 섬유로 만든 우리나라 한지는 색이 잘 스며들어 옷과 양말도 만들 수 있어요."
그는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앙부처와 지자체, 공공기관, 학교 등에 상장 제작용 한지 2만매를 보급했지만 더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장 뿐만 아니라 발령장 등 공문서 모두 한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요. 컴퓨터 인쇄지도 한지로 가능해요. 요즘 최고 예술가들은 사진을 한지에 인화해 작품의 독창성을 높이죠. 한지 용도를 늘려야 관련 산업 활성화되요."
그는 평생 고문헌을 접해온 역사학자이기에 한지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나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16건 중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13건은 전통 한지를 사용했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만들고 전승한 주요 문화유산 바탕이 한지였다.
"외규장각 의궤(조선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 기록)는 금방 그린 것 같이 살아 있어요. 한지 질감이 아주 견고해요. 경주 불국사 해체 공사 과정에서 나온 8세기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한지 우수성을 증명하죠. 우리 예술과 기록 역사 대부분이 한지 덕분에 명맥을 이었어요."
일하면 체력이 생기고 즐거우면 피곤을 모른다는 그는 전국 한지 공방을 직접 찾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이미 문경, 가평, 원주, 안동, 양산, 전주를 다녀왔고, 앞으로 의령, 괴산 한지 공방을 답사할 예정이다.
고단한 여정에 힘을 보태는 인사들도 늘고 있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과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종규 문화재청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한지 공방 지역 국회의원과 지자체장, 노영혜 종이문화재단 이사장 등이 동참하기로 했다. 그는 "이어령 선생이 한지에 해박하고 반 전 총장은 뉴욕 유엔 사무총장 관저와 프레스룸을 한지로 꾸몄다"고 했다.

바쁜 일정에도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저서 '역사에서 길을 찾다'(행복에너지 펴냄)를 최근 출간했다. 그는 "후손들이 유구한 역사를 알아야 세계로 미래로 알릴 수 있다"며 "전통유산에서 지혜와 도덕, 자긍심, 긍정의 힘, 상상력, 창의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를 지키는 '주인'이 따로 없으며, 공부해서 '전도사'가 되어 '자긍심'을 갖고 세계에 자랑하는 일명 '주전자' 정신을 강조했다.
현재 와이즈유 영산대 석좌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사립대 총장협의회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 국가브랜드위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 한국여성사학회·한국사상사학회·조선시대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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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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