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는 돌이 아니다"…나체로 돌무더기 뛰어다니고 돌탑 쌓은 미술가
입력 2021-04-21 13:14  | 수정 2021-04-21 14:06
돌무더기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생전의 박현기 작가. [사진 제공 = 갤러리현대]

영상 화면에서 중년 남자가 나체 상태로 돌무더기 사이를 걷고 뛴다. 돌처럼 웅크려 앉은 그의 등에는 "I'm not a stone(나는 돌이 아니다)"이라는 영어 문장이 씌여져 있다. 벌떡 일어선 그의 가슴과 배에는 "stone and so forth(돌과 돌이외의 것)"가 적혀져 있다. 언어와 사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기 벌인 행위예술이라고 한다.
1983년 대구 수화랑에서 이 대담한 퍼포먼스를 펼친 사람은 '한국 비디오 아트 선구자' 박현기(1942~2000년)다. 내년에 국립현대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기획하는 '아방가르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에 그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 기획전을 앞두고 서울 갤러리현대가 1978년부터 1997년까지 그의 주요작품 10점을 모은 개인전 '나는 돌이 아니다'를 5월 30일까지 펼친다. 2010년 작가의 10주기 전시, 2017년 개인전을 열었던 화랑이다.
생전의 박현기 작가. [사진 제공 = 갤러리현대]
그가 행위예술을 펼쳤던 돌무더기가 이번 전시장 지하1층 바닥에 널려 있다. 수많은 돌 중앙에는 마이크가 매달려 있다. 관람객들의 발자국 소리를 증폭하는 장치다. 1983년 겨울 작가가 운영하던 대구 큐빅 디자인 연구소에서 수화랑까지 걸어가면서 비디오 카메라로 채집한 소리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1982년 대구 근교 강정의 낙동강변에서 야외 전시를 열었던 작가가 이듬해 돌무더기를 수화랑 바닥에 가져와 펼쳤던 작품 '무제'를 재현했다. 38년전 시간과 현재 소리가 공존하면서 묘한 울림을 준다.
작가와 돌의 첫 인연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진짜 돌과 레진으로 만든 가짜 돌을 쌓은 탑 3점 '무제'가 이번 전시장에 놓여 있다. 자연과 인공, 진짜와 가짜의 경계와 관계를 탐구한 작품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돌을 주워 성황당 돌무더기에 던지는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작가는 인간의 소원을 투영한 돌탑 작업을 시작했다. 돌은 태고의 시간을 간직한 자연물이기도 하다.
박현기 1988년 TV돌탑 `무제`. [사진 제공 = 갤러리현대]
2층 전시장에는 박현기 대표작 TV돌탑 '무제'가 우뚝 서 있다. 바위 사이에 쌓은 TV 모니터 4개 화면의 바위가 탑을 잇는다. 높이 3m로 TV돌탑 작품들 중 가장 크다. 1988년 일본 세이부 미술관 츠카신홀에서 열린 그룹전 '일본과 한국 작가로 본 미술의 현재: 수평과 수직'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자연과 문명, 사물과 환영을 쌓은 TV돌탑 연작은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주목을 받았다.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1990년 '만다라' 연작 4점은 맞은편에 설치돼 있다. 천장에 설치된 프로젝터가 불교 의례용 헌화대에 투사한 붉은 영상은 불교 도상과 포르노의 혼합이다. 초당 30프레임 이상 짧은 영상들이 100여겹 넘게 겹쳐져 어떤 화면도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1997년 뉴욕 킴 포스트 갤러리 그룹전을 재현한 이 작품은 가장 세속적인 인간의 본능 행위와 종교적 도상을 결합해 우주와 존재의 근원을 성찰했다. 당시 함께 전시한 '세계 비디오 아트 선구자' 백남준(1932~2006년)이 극찬한 작품이다.
1986년작을 2021년 다시 제작한 `무제(ART)`. [사진 제공 = 갤러리현대]
전시장 1층에는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활동한 작가가 공간을 탐구한 1986년 목재 조립 작품 '무제(ART)'가 재현돼 있다. 미송 향기를 맡으며 2m 높이 지그재그 형태 목조 구조물 공간을 탐색하는 작품이다. 직선과 곡선,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세 구조물은 알파벳 A, R, T 모양이지만 작품 사이를 헤매는 관람객은 전체 윤곽을 가늠하기 힘들다. 이게 바로 예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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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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