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대 미술축제인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친일파 92명을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운 그림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31일 개막하자마자 민중미술 1세대 작가 이상호 작가(61)가 박정희 전 대통령, 한국화가 김은호·김기창, 소설가 이광수, 시인 최남선·서정주, 작곡가 안익태,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을 단죄하고 행적을 기록한 그림 '일제를 빛낸 사람들'(417×245㎝)이 관람객들 시선을 집중시켰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아버지이자 일제강점기 기업인 백낙승, 소설가 전혜린의 아버지이자 일제강점기 경찰간부였던 전봉덕, 농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로 민비 시해사건 주동자였던 우범선도 그림의 일부가 됐다.
이상호 작가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물 중 군인·경찰·관료·언론·문화예술 부문에서 92명을 간추렸다. 70여년 전 '반민특위' 해체로 심판받지 못했던 자들을 그림으로 심판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지에 반복해서 색을 칠해가며 그들의 비열한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뒀다.
지난해 1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그는 "친일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메스꺼움이 가슴에서 튀어나와 고통스러웠다"며 "김구·장준하 선생의 얼굴이나 내가 그린 '통일열차 타고 베를린까지'라는 그림을 보며 붓을 곧추 세웠다"고 밝혔다.
최근 '뉴욕타임스'에도 소개된 이 그림은 오는 5월 9일 광주비엔날레가 끝나면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걸린다. 작가는 "그림 속의 그들은 영원한 역사의 죄인이다. 그래서 예술의 힘이 무섭다는 것"이라며 "내 그림을 통해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작품 외에도 이라크 전쟁, 권력해부도, 통일염원도, 지옥도 등 반전과 통일 등의 염원이 담긴 다양한 작품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걸었다. 그는 조선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군사정권 시절인 1987년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새날이여'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바 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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