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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임에도 빛나던 ‘자산어보’[한현정의 직구리뷰]
입력 2021-03-20 07:52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현정 기자]
흑백 영화지만 빛이 난다. 어둡고 슬픈 이야기지만 밝고 따뜻하다. 단조로운듯 다채롭고도 유머러스하기도. 다만 차곡차곡 쌓아가던 감정이 중도 하차해 여운은 깊지 않다. ‘대립이 아닌 ‘다름에 대한, 불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돋보이는, 그러나 급마무리가 아쉬운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다.
영화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실학자 정약용의 형이자 멘토였던 정약전(설경구)이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청년 어부 ‘창대를 만나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1814년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 생물을 상세히 기록해 만든 어보(魚譜)의 서문을 바탕으로 영화화 했는데 ‘자산어보를 비롯한 정약전의 다양한 저술서들의 집필 과정을 담고 정약용이 지은 한시와 극 중 인물이 맞닥뜨린 상황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여기에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진정한 벗의 우정을 나눈 정약전과 창대의 교감을 주요 스토리로 입혀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 시켰다.
순조 1년,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은 호기심이 많은 성격으로 처음 보는 바다 생물들에 매료돼 책을 쓰기로 결심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게다가 글공부에 미쳐있는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사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당한다. ‘톰과 제리 같은 두 사람은 좁혀지지 않을듯 점차 가까워지고, 결국 서로의 지식을 바꾸기로 ‘거래를 한다.

그동안 ‘사건이 아닌 ‘사람에 집중해온 이준익 감독은 이번에도 ‘영웅 아닌 ‘사람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그 중에서도 ‘대립 아닌 ‘다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현시대까지 관통하는 가치를 전한다.
이 덕분에 비극적 역사적 사건이 배경으로 하지만, 모든 빛깔이 사라진 흑백 영화 임에도 영화는 밝고 따뜻하며 다채로운 빛을 발산한다. 한 시대에 위대한 인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혼자 탄생한 것이 아니며, 어떤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데에도 단일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 옆에는 그 못지 않은 위대한 인물들이, 중요한 과정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무수한 이유들이 쌓여 생긴다는 보편적 진리를 녹여낸다.
이준익 감독의 이 같은 통찰력과 따뜻한 시선은, 설경구 변요한 그리고 이정은 등의 명품 배우들의 열연과 어울어저 제대로 빛을 낸다. 설경구 변요한은 예상 가능한, 그럼에도 빠질 수밖에 없는 훈훈한 케미를 보여준다. 설경구와 이정은의 러브라인은 반전의 보너스.
그러나 인물에 대한 고증이 부족한 탓인지 허구를 입혀 역사적 사실에 최대한 부합시켜 마무리를 지으려다 보니 드라마적 매음세가 후반부로 갈수록 지나치게 헐거워진다. 차곡차곡 쌓아오던 소소하지만 애틋했던 웃음과 감동은 다소 허무할 정도로 급속도로 비극으로 치달아 엔딩을 맞아 여운을 느낄 새가 없다. 눈물이 나올법한 클라이맥스에서도 다소 덤덤하고 영화가 끝난 뒤 울림이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신선한 소재와 따뜻하고도 섬세한 연출,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과 배우들의 명연기로 호감 가는 영화로 완성됐다. 잔상이 별로 없단 게 아쉽지만. 깊어지는 맛보단 그저 부담 없는 맛이다. 오는 3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6분.
kiki2022@mk.co.kr[ⓒ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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