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민중운동가 백기완, 마지막 가는 길 시민 1000여명 추모
입력 2021-02-19 16:32  | 수정 2021-02-19 17:42
19일 정오 경 고 백기완 선생의 운구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앞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윤식 기자]

민중운동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향년 89세)의 사회장(葬) 마지막 날 각계에서 모인 1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영결식이 엄수됐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1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의 발인을 시작으로 대학로에서의 노제, 시청으로 이어진 운구 행렬과 서울광장에서의 영결식을 진행했다.
이날 오전 8시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는 유족과 추모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발인이 이뤄졌다. 오전 9시께부터는 고인이 살아 생전 노동·통일·민중운동을 한 거점이 된 통일문제연구소가 있는 대학로 소나무길 일대에서 노제가 이뤄졌다. 노제에는 민주노총과 산하 단체를 비롯해 4·16세월호참사유가족협의회, 전국철거민연합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일반 시민 등 수백명이 참여했다.
19일 오전 고 백기완 선생의 운구 행렬 선두의 풍물패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앞을 지나고 있다. [이윤식 기자]
상임공동장례위원장인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노제에서 "고인의 장례식에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해왔던 이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오히려 이 땅의 평범한 일반 노동자와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며 "선생님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였고 가장 든든한 방패였고 어른이자 큰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노제를 마친 9시50분께 운구는 대학로를 떠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위패와 영정사진을 앞세운 운구 행렬 뒤로는 고인의 모습을 본딴 거대한 한지 인형, 꽃상여, 수십 명의 풍물패가 이어졌다. 고인의 모습을 본딴 상(像) 앞에는 '노나메기 차별없는 세상! 해고없는 세상! 김진숙 복직!' '제대로 만들어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등 구호가 적힌 인형이 서 있었다. 운구 행렬에는 노동·시민단체 등이 참여해 300m가량 이어졌다. 행렬은 1시간 30여분에 걸쳐 종로5가역, 종묘 앞, 종각역, 광화문역 앞을 지나 서울광장에 도착했다.
영결식은 서울광장에서 오전 11시 30분께부터 진행됐다. 운구행렬에 영결식장에 미리 모인 인파가 합쳐져 추모객은 10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은 4·16세월호유가족협의회 등 유가족들이 맡았다. 세월호 유가족 측은 합창에 앞서 "백기완 선생님을 세월호 유가족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며 "두 눈 감으실 때까지 놓지 않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다시 촛불을 든다"고 말했다. 추모식에는 이재명 경기지사,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 진보 정치인들도 직접 참석했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고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는 운구 행렬이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윤식 기자]
산재사고 희생자 고 김용균 군의 모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추도사 글을 통해 "'김진숙 김미숙 힘내라'는 말씀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셨다고 들었다"며 "사력을 다해서 마지막으로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 오셨던 기억이 스치면서 절절함에 가슴이 아파온다"며 애도를 표했다.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노무현 정권시절 재야가 사라지고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아 '철없는' 투쟁을 할 때도 선생님은 늘 맨 앞에서 정권을 향해 비수같은 말씀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셨다"라는 회고 글을 썼다.
신철영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도 "선생님은 민중, 특히 투쟁하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분"이라고 회고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의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가사처럼 남은 우리들이 선생님이 앞서 가신 길을 잘 따르겠다고 다짐한다"고 썼다.
9일 정오 경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백기완 선생 영결식장에서 시민들이 운구를 맞이하고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윤식 기자]
고인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나 1948년 서울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52년부터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열고 도시빈민운동,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 4·19혁명 운동에 뛰어들어 정치민주화와 통인운동에 애썼고, 1964~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1966년 박정희 유신독재 종식을 위해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선생과 함꼐 야권 통합운동을 성사시켰고, 1969년 3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1972년 항일민족론을 출간하고 이듬해에는 백범어록을 출간했다. 같은 해 유신헌법 개헌에 문제를 제기하며 '개헌청헌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듬해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1979년 '명동 YWCA위장결혼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으로 정신을 잃고 깨어나 쓴 시가 '묏비나리'다. 묏비나리는 '우리 강산을 위한 기원'이란 뜻이다. 이 시에 쓰인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등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됐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 그는 민중 후보로 출마했지만 김대중·김영삼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선거 이틀 전 사퇴했다.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지만 1% 득표율에 그쳤다.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했다. 노동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2000년 계간지 '노나메기'를 창간하고 노나메기 운동을 제안했다.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래서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착하고 어질고 깨끗하고 올바르게 잘사는 세상'을 뜻한다.
[이윤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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