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日 고문에 가슴 잃고, 손가락 잘라 혈서 쓰고…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
입력 2021-02-19 11:14  | 수정 2021-02-19 16:02
윤석남 화백. [사진 제공 = 학고재갤러리]

붉은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왼팔을 치켜 든 초상화가 위풍당당하다. 세로 210㎝, 가로 94㎝ 대형 화폭을 꽉 채운 그는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다.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만세를 외치라고 하는 듯 진취적인 자세다. 그런데 오른쪽 저고리가 유난히 밋밋하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오른쪽 가슴을 잃고도 "너희 할 대로 다 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뺏으리라"고 호통치며 끝내 무릎을 꿇지 않았다.
윤석남 작가. [사진 제공 = 학고재갤러리]
그를 포착한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고 그의 책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더해 초상화를 그린 윤석남 화백(82)은 "일본 경찰에 당당했던 그는 두려움이 없는 분 같다"며 "망가진 몸 때문에 평생 결혼을 안 하고 해방 직전에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시아 여성 미술 대모' 윤 화백이 김마리아를 비롯해 강주룡, 권기옥,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로 학고재갤러리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를 펼쳤다. 가늘지만 완강한 세필(細筆) 붓질과 강렬한 원색으로 남성 중심 역사에서 빛을 보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한(恨)이 서린 초상화를 그렸다.
독립운동가 남자현 초상(210x94cm). [사진 제공 = 학고재갤러리]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학구열이 넘치는 윤 화백은 "조선시대 초상화를 공부했는데 여성 초상화는 일제점령 이후 딱 2점 있더라. 한 여자로서 화가 나서 여성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독립운동가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영화 '암살' 주인공의 모델인 남자현(1872~1933)의 초상화가 가장 충격적이다. 흰 소복을 입고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내 붕대를 감고 있는 할머니가 결기에 차 있다. 그의 앞에는 피를 묻힌 붓과 두루마리 종이가 놓여 있다.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이 일본의 만주사변을 조사하러 하얼빈에 왔을 때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 마디와 함께 보냈다. 나라를 뺏긴 경술국치 때도 왼손 엄지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썼고, 2년 후 독립군들끼리 유혈 충돌이 일어나자 손가락을 벤 피로 쓴 글씨를 각 단체 책임자들에게 보냈다.
독립운동가 박자혜 초상(210x94cm). [사진 제공 = 학고재갤러리]
윤 화백은 "관동군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대사를 암살하러는 가는 길에 일본 경찰에 잡혀 단식투쟁을 하다가 중국에서 숨을 거뒀다"며 "여성이 대접 받지 못하던 시대에 왜 목숨을 바쳤을까 이해가 안 됐다"고 말했다.
윤 화백의 여성 독립운동가 연구에 도움을 주고 이번 전시 제목과 같은 책을 출간한 김이경 소설가는 "독립운동이 여성으로서 존재감을 가지기 위한 여성해방운동 통로였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정정화 초상(210x94cm). [사진 제공 = 학고재갤러리]
남자현 초상화 옆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안주인이었던 정정화(1900~1991)가 기차역에 앉아 있는 그림이 있다.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을 따라 중국으로 간 그는 홀로 국경을 넘으면서 임시정부 자금을 조달했다. 해방 후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한국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자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부역죄로 구속됐다.
윤 화백은 "91세까지 오래 살아 한국의 모순된 역사를 몸으로 겪은 분이다. 작고 아름다운 분인데 인왕산 자락 집 마당에 내려온 호랑이를 맞닥뜨려도 겁없이 쳐다봤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독립운동가 신채호 유골함을 들고 비분강개한 아내 박자혜(1895~1943) 초상화가 우뚝 서 있다. 간호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윤 화백은 그들이 흘린 피를 상상하며 바닥과 유골함 보자기를 붉게 그렸다.
총독부와 일본 황궁을 폭파하려고 중국군 비행대에서 복무한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1~1988) 초상화는 늠름하다. 1931년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고공 농성을 벌인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1901~1932) 초상화는 비장하다. 러시아에서 일본군에 맞서다가 총살당한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1885~1918)가 거울을 보는 모습에서 비애가 느껴진다. 러시아 사람들은 그의 시신이 떨어진 하바롭스크 아무르강에서 3년 동안 낚시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추모했다.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초상(210x94cm). [사진 제공 = 학고재갤러리]
초상화 인물들 대부분 슬픔과 분노로 눈꼬리가 올라가 있으며 손이 크고 거칠다. 작가는 "손은 그 사람을 상징한다. 힘들게 살아온 그들의 인생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독립운동가 열정과 피를 상징하는 설치 작품 '붉은 방'에는 종이 콜라주 850점과 거울 70개, 여성 독립운동가를 추상화한 나무 조각 50개로 구성됐다.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을 그리겠다는 작가 목표의 암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 서문을 쓴 김현주 추계예술대 교수는 "선생님의 작업 속도가 빨라서 2~3년 내 100인을 완성할 것 같다"며 "여성미술의 지침목이자 버팀목이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초상(210x94cm). [사진 제공 = 학고재갤러리]
윤 화백은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는 순간 얼어붙어서 서양화 붓을 버리고 한지 위에 채색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나의 뿌리를 알고 싶어 채색화를 배웠고 지금 행복하다"고 했다.
오광심, 이병희, 조신성, 김향화, 동풍신, 부춘화, 윤희순, 이화경 등 8인의 초상화는 학고재 온라인 전시 공간 '오룸'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4월 3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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