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카슐랭]`겉과 속이 다른 SUV` 혼다 파일럿, 미국차야 일본차야
입력 2021-01-05 06:29  | 수정 2021-01-07 14:25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표리부동'
마음이 음흉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에게 쓰는 부정적 사자성어다. 제품을 평가할 때는 다르다. 겉 다르고 속이 달라 '이색(二色)' 매력을 발산한다는 긍정적 의미도 지녔다.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포드 익스플로러와 함께 대형 SUV 대표주자로 활약했던 혼다 파일럿(Pilot)도 표리부동 SUV다. 겉은 미국차, 속은 일본차다.
이유가 있다. 혼다 파일럿은 일본 자동차회사인 혼다가 대물을 선호하는 미국인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2003년 출시한 전략 모델이다.
미국에서 '대박'난 혼다 CR-V를 보조하면서 혼다의 위상을 높이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생산하는 곳도 미국이다.

외모는 2세대까지 여타 미국 SUV처럼 컸고 단순했고 투박했다. 선 굵고 각진 '아메리칸 스타일'을 고수했다.
2015년 나온 3세대부터는 크고 단순하면서도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비슷한 시기 선보인 다른 미국 SUV도 마찬가지로 디자인이 변했다. 아메리칸 스타일을 버린 게 아니라 진화시킨 셈이다.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속은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니다. 얼핏 보면 미국 SUV와 차이 없다. 멋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둔 것처럼 단순 투박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깔끔하고 섬세하다. 3세대부터는 그 차이가 더 벌어졌다.
미국인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 일본 연구서 '국화와 칼', 이어령 교수의 '축소 지향의 일본인'에 나오는 내용을 연상시킨다.
실내는 국화처럼 정갈하다. '칼'이 지배한 전국시대를 거치며 겉 표정(다테마에)과 속마음(혼네)이 달라지고, 날이 바짝 서있는 폭력적인 칼을 숭상하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하며 다도(茶道)를 즐기는 복잡한 일본인의 정신세계가 보인다.
소니 워크맨이나 기차 도시락처럼 일본 문화의 축소지향 특징인 '미니멀리즘'(Minimalism)도 엿보인다.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현재 국내 판매되는 파일럿은 3세대 모델의 상품성을 향상한 2021년형 모델이다. 전장×전폭×전고는 5005×1995×1795㎜다. 실내공간을 결정하는 휠베이스는 2820㎜다
5m 넘는 덩치이지만 위압감과 함께 거부감을 주던 '구식 아메리칸 스타일'은 탈피했다. 전반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질리지 않게 디자인됐다.
일본차의 장점이자 '국화' 성향인 섬세함과 자상함을 외관에도 적용했다. 승차 때 발 디딤이 용이하도록 러닝 보드를 새롭게 장착, 편의성을 높였다. 크롬 라인을 적용해 강인함과 세련미도 강조했다.
러닝 보드 하단에 스팟 라이트를 적용했다. 승하차 때 외부 바닥을 밝게 비춰준다. 1열과 2열 도어 입구 하단에는 'PILOT' 로고가 새겨진 LED 타입 사이드 스텝 가니쉬도 새롭게 장착했다. 도어를 열면 로고가 점등된다.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실내는 조작 버튼도 크고 디자인도 투박한 아메리칸 스타일을 완전 탈피했다. 운전자를 감싸는 레이아웃을 적용했다. 심플하면서도 아늑하다.
기어 스틱은 보이지 않는다. 전자식 버튼 타입 변속 시스템을 채택해서다. 단수는 9단이다. 변속 고수다.
TFT 디지털 계기판은 시인성이 좋다. 8인치 디스플레이는 아쉽다. 요즘은 9인치를 넘어 12인치도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여서다.
대신 애플 카플레이 및 안드로이드 오토와 연동하고 아틀란 3D 내비게이션을 채택해 편의성은 향상됐다. 스마트폰 무선 충전 장치도 달았다.
패밀리카로 사용하는 7인승 대형 SUV답게 2·3열에 주로 타는 가족을 배려하는 기능도 다양하게 갖췄다.
캐빈토크는 차명 파일럿에 어울리는 편의 장치다. 차량 스피커·헤드폰잭·무선 헤드폰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통제해 탑승객들에게 항공기 기내 방송과 같은 편안한 안내를 도와준다.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항공기 1등석에 타고 여행하는 기분도 제공한다. 2열 캡틴 시트는 항공기 1등석처럼 편안하다. 2열 루프 상단에 배치한 10.2인치 모니터와 2개의 무선 헤드셋도 가족을 VIP로 대접해준다.
3열 탑승도 쉽다. 2열 등받이에 있는 워크인 스위치를 누르면 시트가 자동으로 앞쪽으로 움직인다.
3열 시트는 6대4 분할 폴딩할 수 있다. 평평하게 접을 수도 있다. 코로나19 시대 유행한 차박(차+숙박)도 편하게 즐길 수 있다.
트렁크 적재 용량은 467ℓ, 3열 시트를 접으면 1325ℓ, 2열까지 눕히면 2376ℓ에 달한다. 손 쓸 일이 없는 핸즈프리 파워 테일게이트도 장착했다. 뒷 범퍼 하단에서 발로 차는 동작만으로 트렁크 도어를 열 수 있다.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시승차는 V6 3.5L 직분사식 i-VTEC 엔진을 적용했다. 최고출력은 284마력, 최대토크는 36.2㎏·m다.
5m가 넘는 덩치지만 다루기 쉽다. 스티어링휠(핸들)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고 적당하다.
주행성능은 미국 대형 SUV가 아니라 일본 패밀리 세단을 닮았다. 투박한 움직임은 없다.
가속페달을 밟으면 부드러우면서도 가볍게 치고 나간다. 곡선 구간에서는 민첩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움직인다.
정숙성도 우수하다. 도어 실링 방음 기능과 두꺼워진 도어 유리가 주행 소음을 줄여준다. 서스펜션은 노면 충격도 잘 흡수해 덜컹거림이 적다.
혼다 센싱 기술을 통한 자동감응식 정속 주행 장치,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 추돌 경감 제동 시스템, 도로 이탈 경감시스템, 후측방 경보 시스템도 적용해 안전성을 높였다.
반(半) 자율주행 성능은 수입차 중에서는 수준급에 해당한다. 앞 차를 알아서 따라가며 가감속하고 끼어드는 차가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브레이크를 활성화한다.
지능형 지형관리 시스템은 눈 덮인 산악도로, 진흙탕 길, 모래사장 등을 헤쳐나갈 수 있게 지원한다.
연료효율성은 덩치 크고 배기량도 큰 만큼 좋은 편은 아니다. 복합연비는 8.4㎞/ℓ다. '기름 먹는 하마' 수준까지는 아니다. 가격은 5950만원이다.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2021년형 파일럿은 외모는 미국차이지만 실내는 일본차다. 편의사양과 성능도 일본차다. 운전도 쉽고 장시간 운전에도 피로도가 적다. 2·3열에 타는 가족에게는 자상하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색(二色) 매력을 넘어 일본차 같기도 미국차 같기도 한 색다른(異色) 매력도 추구했다.
치명적인 단점은 디자인, 성능, 가격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일관계다.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역사 왜곡 도발에 경제 도발까지 겹쳐 발생한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혼다코리아가 넘을 수 없는 파고다.
혼다 파일럿 [사진 제공=혼다코리아]
※MSG
파일럿은 캘리포니아 롤(California roll)과 무스비를 연상시킨다.
캘리포니아 롤은 일본 초밥에서 유래한 미국식 김초밥이다. 날 생선에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아보카도와 마요네즈를 더해 이국적인 맛을 낸다. 크기도 일본 초밥보다는 큰 편이다. 색깔도 알록달록해졌다. 미국식 김초밥이지만 아기자기한 멋과 맛을 추구하는 일본 초밥에 가깝게 다시 진화했다.
무스비는 미국 하와이 인기 음식이다. 하와이가 고향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좋아하는 간식이다.
무스비는 하와이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많이 먹던 초밥에서 유래했다. 생선 대신 미군용 보급품인 가공햄 '스팸'을 넣어 만든다. 캘리포니아롤처럼 미국화된 일본 음식이다.
무스비는 세월과 함께 달라졌다. 초기에는 투박하게 스팸만 얹은 형태에서 검정 김이 추가됐다. 바비큐 소스와 노랑 계란지단을 더해 맛과 멋을 향상했다.
캘리포니아롤과 무스비 모두 초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국적인 맛과 멋을 지녔다. 음식도 자동차도 사는 곳에 따라, 사는 방식에 따라, 세월에 따라 진화한다.
[최기성 매경닷컴 기자 gistar@mkinter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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