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제국 세우고 떠난 '프랑스 패션계 선구자' 피에르 가르뎅 영면
입력 2020-12-30 09:46  | 수정 2021-01-06 10:03

현지시간으로 어제(29일) 98살의 나이로 세상과 영원히 작별한 프랑스 패션계의 거장 피에르 가르뎅의 이름이 적혀있는 제품들은 한때 전 세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가장 잘나가던 1970년대에는 '피에르 가르뎅'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있는 상품들을 10만여 개 매장에서 판매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나는 내 와인을 마시고, 내 극장에 가고, 내 식당에서 식사하고, 내 호텔에서 자고, 내 옷을 입을 수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던 그의 과거 발언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제품들이 '싸구려', '구식' 취급을 받곤 하지만 그가 개척한 라이선싱 사업은 그에게 막대한 부와 명성을 안겨줬다고 AFP, AP 통신 등이 전했습니다.

피에르 가르뎅은 1970년 프랑스 텔레비지옹과 인터뷰에서 "수백만 프랑(유로화 도입 이전 프랑스의 화폐 단위)의 드레스보다 넥타이를 팔아서 버는 돈이 더 많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초기에는 피에르 가르뎅의 라이선싱 사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르마니, 불가리, 구찌 등 내로라하는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발을 걸치는 사업이 됐습니다.

14살에 처음 재단사 일을 시작해 구순이 넘어서도 무대에 섰던 피에르 가르뎅은 예술적 감각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나의 목표는 내 이름과 내의 작품이 거리에 있는 것이었다"라던 피에르 가르뎅은 자신이 만든 의상을 평범한 사람들도 입을 수 있기를 바라왔다고 합니다.

피에르 가르뎅은 "유명인사들, 공주들을 존경하고 함께 저녁을 먹곤 했지만 그들은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며 "그들이 내가 만든 드레스를 입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59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프랭탕백화점에서 기성복 전시회를 열었다가 파리의상조합에서 일시적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피에르 가르뎅은 1992년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스 미술아카데미(Academie des Beaux-Arts)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동료 디자이너들의 경멸을 받았을지언정 프랑스가 패션을 공식적으로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하는 상징적인 순간에는 피에르 가르뎅이 있었던 것입니다.

피에르 가르뎅 밑에서 일하며 디자이너로 데뷔한 장 폴 고티에는 트위터에 "나에게 패션의 문을 열어주고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글을 올려 피에르 가르뎅을 추모했습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베네통을 이끄는 장샤를르 드카스텔바작은 피에르 가르뎅을 패션, 디자인, 건축에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 "아주 비범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습니다.

대를 이을 후손이 없었던 피에르 가르뎅은 2009년 일부 라이선스를 매각하면서 '제국'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2011년에는 회사 전체를 팔려고 했으나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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