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코로나 모범국` 대만 뒤흔드는 독돼지 사건…중국만 미소짓는다
입력 2020-12-25 10:20  | 수정 2021-01-01 10:36

일명 '독돼지 사건'.
지난 2011년 식품 안전성을 둘러싸고 중국은 한바탕 소동에 휩싸였다.
중국으로 반입되는 미국산 냉동 돼지고기와 햄에서 돼지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의약품인 락토파민 성분이 검출됐다는 검역당국 발표가 나온 것.
"하루 세 끼 중 한 끼는 무조건 돼지고기 반찬이 오른다"고 할 만큼 돼지고기 소비가 활발한 중국인들은 천식약 성분에서 유래한 락토파민을 먹인 미국산 돼지고기를 '독(毒)돼지'라고 부르며 분노했고, 당국은 락토파민 관련 수입육 검역을 대폭 강화했다.

그런데 수 개월 뒤 이번엔 대만에서 락토파민 파동이 벌어졌다.
논란을 일으킨 주체는 미국산 락토파민 육류가 아닌 대만 최고권력자였다.
당시 마잉주 총통은 미국과의 관계 강화 및 통상협정 체결의 모멘텀을 만들고자 락토파민을 함유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겠다고 결정했다.
직전 중국 본토에서 벌어진 '독돼지 사건'에 놀랐던 대만 국민들과 축산업계는 "동맹 강화에 국민 안전을 포기하는 것이냐"며 발끈했고, 예상을 넘어서는 국민적 반발에 놀란 마잉주 총통은 허용 계획을 전면 철회했다.
그리고 8년이 흘러 지금 대만에서 다시 독돼지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혼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과 연대 강화에 진력해야 하는 대만의 처절한 현실이 확인된다. 동맹강화와 국민안전을 두고 자중지란에 빠진 대만 정치권을 지켜보는 중국은 소리없는 웃음을 짓고 있다.
8년만에 다시 등장한 美 락토파민 육류 파동
현재 대만을 이끌고 있는 리더는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으로 코로나19 철통 방역에 성공해 국제적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차이 총통은 과거 마잉주 전 총통이 꺼냈던 미국산 락토파민 육류 수입허용 문제로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섰다. 미국과 동맹 강화 및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해 락토파민 사료를 먹인 미국산 돼지고기를 전향적으로 수입키로 결정한 것이다.
돼지고기 부위 별로 락토파민의 잔류 허용치(MRL)를 설정하는 등 관련 법안들이 성탄절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한국의 국회 격인 대만 입법원을 통과했다.
입법 논의 과정에서 야당인 친중 성향의 국민당 의원들은 돼지 내장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와 의회 바닥에 내던지고 이를 여당(민진당) 의원들에게 투척하는 등 초유의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돼지 내장을 손에 쥔 국민당 의원들이 8년 전 마잉주 총통 하에서 락토파민 성분이 함유된 미국산 쇠고기를 허용하려 했던 여당 세력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락토파민이 대체 뭐기에
락토파민은 살코기(단백질) 함유량을 높이고 지방 생성을 억제하기 위해 소·돼지 사료에 첨가하는 의약품이다.
1999년 페일린이라는 업체가 개발한 제품을 미국 식품의약국(FDA)가 승인하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캐나다, 호주, 브라질 등 글로벌 육류 생산국들이 이 의약품을 사료용으로 허가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적정 잔류 허용치를 설정하고 자국 축산업계의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이를 먹인 해외 수입육에 대해 엄격한 검역 조사 후 반입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검역 기준이 엄격한 유럽연합(EU)과 막대한 돼지고기 소비를 자랑하는 중국 등 세계 120여개국이 아직까지 락토파민의 사용과 관련 육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8년 전 친중 총통의 락토파민 계산법
2012년 락토파민 쇠고기 사건을 촉발한 국민당 소속 마잉주 총통 앞에는 재선이라는 이슈가 있었다.
친중 성향의 국민당 지지표와 더불어 최대한 반중 성향의 표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관계개선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마잉주 총통의 정치 셈법에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적극 호응했다.
예컨대 미국 고위 관료인 대니얼 폰먼 미국 에너지부 부장관이 총통 선거를 코앞에 두고 2011년 12월 전격 대만을 방문했다.
중국과의 마찰 가능성을 고려해 고위급 관리를 대만에 보내지 않았던 미국이 기존 행보와 180도 달라진 행보를 취했다.
흥미로운 점은 대만 땅에 미국 고위 관료가 발을 내디뎠음에도 중국 정부가 별다른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중 집권당인 국민당과 마잉주 총통이 재선에 승리하는 게 까칠한 민진당과 차이잉원 총통 후보보다 중국 본토에 유리한 권력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관계개선을 보여주는 여러 상징적 사건들이 이뤄지고 2012년 1월 14일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 총통은 실제 반중 성향의 민진당 대권 후보인 차이잉원을 6%포인트 격차로 여유롭게 따돌리며 연임에 성공했다.
정치적 목표를 달성한 마잉주 총통이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미국에 대한 상호 호혜 조치로 락토파민을 먹인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허용하는 방안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계획에 대해 대만 국민들과 축산업계가 "동맹이 국민 생명보다 중요하냐"며 결사 반대를 외치면서 검역 문제를 넘어선 정치 사건으로 확산됐다.
2008년 한국에서 전개된 광우병 파동 논란과 판박이었다. 집권 후 가장 강력한 국민적 저항을 목도한 마잉주 총통은 결국 입법 시늉조차 내지 못하고 자신의 계획을 접어야 했다.
현 반중 총통의 락토파민 정치셈법
역대 대만 총통 중 가장 강력한 반중 노선을 걷고 있는 차이잉원 현 대만 총통이 2012년 선거에서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마잉주 전 총통와 동일한 미국산 락토파민 육류 수입 카드를 꺼내든 것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대목이다.
올해 초 재선에 성공한 차이 총통은 지난 5월 취임 연설에서 중국이 강요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하며 유례없는 반중 노선을 펼치고 있다.
차이 총통이 국민적 반발이 불보듯 뻔한 락토파민 카드를 내민 이유는 미국과의 경제 결속력 강화 때문이다.
마치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자동차 안전기준과 글로벌신약의 적정 가격 문제를 매년 시비 걸며 공정 교역을 막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처럼, 미국산 육류에 대한 대만의 엄격한 검역 기준은 미국이 가장 못마땅해하는 대만과의 비관세장벽 이슈였다.
현지 매체 보도를 보면 대만은 세계 10대 미국산 육류 수입국으로, '락토파민 제로(Zero)를 추구하는 대만의 검역 기준이 바뀌어야 미국은 대만을 상대로 수출물량을 확대할 수 있다.
8년만에 재연된 혼란에 웃음 짓는 中
미국과의 관계 결속을 이유로 차이 총통 집권 하에서 8년만에 락토파민 논란이 벌어지자 가장 신이 난 곳은 중국으로 보인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24일 '대만이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는 미국산 돼지고기를 수입하려 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만 거주인들의 70%가 반대하는데 차이 총통과 민진당이 락토파민을 먹인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위한 9개 법안 처리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중국 본토의 목소리를 언급하며 "(중국과)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민진당은 2000만 인구의 건강을 희생시켜 미국으로부터 허황된 약속과 단기적인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대만 분리독립의 리더인 차이잉원이 국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와 맞서기 위해서는 미국에 깊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조롱했다.
국민적 반발이 큰 먹거리 이슈에서 위험한 정치적 선택을 결정한 차이 총통과 민진당을 비판하며 대국민 지지세를 최대한 떨어뜨리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지난 1월 선거에서 차이 총통은 "대만도 홍콩처럼 될 수 있다"는 유권자들의 반중 심리에 힘입어 817만표(57%)라는 역대 최다 득표수로 재선에 성공했다. 함께 치러진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진당 역시 113개 의석 중 61석을 차지해 과반 의석을 달성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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