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문형표·홍완선, 대법원에 요청 "국정농판 판결, 엘리엇 소송 고려해달라"
입력 2020-12-21 17:24  | 수정 2021-01-04 18:06

'국정농단' 특검이 첫번째로 구속기소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3년째 미뤄지고 있다. 이들보다 늦게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후 파기환송심을 거쳐 다섯번째 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가운데 문 전 장관·홍 전 본부장측이 대법원에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이 제기한 투자자·국가간소송(ISD)을 판결 과정에서 고려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이에 대법원이 '엘리엇 ISD'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해 판결을 늦추고 있다는 의심이 나오고 있다.

문형표 "대법원 판결에 엘리엇ISD 관련돼 있어"...특검은 "구별해야"

21일 특검 등에 따르면, 2018년 엘리엇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8700억원 규모의 ISD 제기한 뒤 홍 전 본부장을 변호한 김능환 전 대법관은 "(피고인의 혐의가) 엘리엇 ISD와 관련돼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상고이유보충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대법원 상고심이 사실 관계가 아닌 법리해석의 잘잘못을 따지는 재판이지만, 행정부가 관련 국제중재심판을 진행중이니 사법부가 이를 고려해 달라는 뜻이다.
이들이 엘리엇 ISD를 끌어들인 것은 '국정농단 심판'과 '엘리엇 ISD 승소'가 대척점이 있기 때문이다. 문 전 장관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국민연금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2017년 1월 구속기소됐다. 홍 전 본부장도 국민연금 투자위원들에게 합병 찬성을 지시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기소됐다. 1·2심 모두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에게 각각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고, 2심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반면 엘리엇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삼성물산 대주주 자격으로 양사의 합병비율이 삼성물산의 가치를 저평가했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최대주주(약 11%)로서 찬성표를 던져 합병이 성사됐다. 이후 엘리엇이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합병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ISD를 제기했다.

특검과 하급심 재판부는 문 전 장관 등이 합병 찬성을 지시했다는 입장이고, 엘리엇은 이 지시로 손해를 봤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이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의 유죄를 확정하면 엘리엇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셈이다.
실제로 엘리엇은 이 재판을 ISD에 활용하고 있다. 올해 1월 엘리엇은 정부에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에 대한 수사기록과 및 1·2심 공판 기록을 제출을 요구했다. 특검 수사에서 나온 참고인과 피의자 서면 진술, 압수수색 물품과 1·2심 공판에서의 증언 기록 등이다. ISD를 맡고 있는 법무부는 "특검이나 법원에 자료를 요구할 권한이 없다"면서 제출을 거부했지만 ISD 중재판정부가 이를 허락했고, 이 기록들은 엘리엇이 확보하고 있다. 당시 법무부에선 기록들이 엘리엇 측에 넘어가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는 후문이다. ▶ 본지 2월 14일자 A1면·3월 4일자 A27면
대법원이 문 전 장관 등에 대한 유죄 판결을 확정하면 ISD에 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국제중재분야 전문 변호사는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하면 엘리엇 측이 '한국의 사법부가 국민연금의 합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결론내렸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문·홍 유죄선고하면 ISD에 도움주는 고약한 상황"

이때문에 대법원이 엘리엇이 판결을 활용할 수 없게 ISD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나온다. 한 법학교수는 "무죄를 선고하면 국정농단 수사가 무리했다는 식으로 비춰지고, 유죄를 선고하면 엘리엇에 도움을 주는 고약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당초 판결 지연 배경엔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특검 등 수사기관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핵심 인사들과 전직 대법원장 등을 이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지만, '직권'이나 '남용', '권리행사 방해'의 개념이 모호해 재판부마다 판단이 달랐다. 그러나 올해 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재판에서 직권남용에 대한 해석을 내놨지만, 그 후로도 1년 가까이 문 전 장관 등에 대한 선고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검 관계자는 "저희도 매우 답답한 사건"이라며 "1,2심의 결론이 똑같은 사건인데 아직까지 절차를 진행하지 않고 있어 의문이다"고 말했다.
사법부가 정부와 사건 처리에 대해 교감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성립 후, 대법원은 정부 정책에 걸맞은 판결을 내놓고 있다.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연구팀와 동아일보는 2005년 9월부터 올해 9월까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을 분석해 현 정부 체제 대법원이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눈에 띄게 진보적인 판결을 내린다고 진단했다. 대법 관계자는 "5년 넘도록 계류중인 사건도 있다"며 "판결이 늦어지는 배경에 대해선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법무부, 엘리엇 ISD에서 특검·법원 주장 반박해야

한편 엘리엇 ISD는 1차 심리를 앞두면서 정부는 특검과 법원의 판단과 대치되는 논리를 펼치게 됐다.
지난달 법무부는 엘리엇 ISD 중재판정부에 제출한 '본안 전 이의제기 서면에 대한 재반박 및 답변서'를 제출했다. 지난 7월 엘리엇의 서면에 대한 반박으로, 중재 심리 착수 전 법무부 주장의 근거를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다. 법무부는 이 문서에서 "국민연금 행위가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다. 설사 국가가 개입했다 하더라도, 국민연금은 주주로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연금이 당시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정부 지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원의 주장은 달랐다. 문 전 장관 2심 재판부는 "문 전 장관이 국민연금공단에 대한 지도·감독권을 남용해 복지부 공무원 등을 통해 홍완전 전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장 등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합병투표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법무부와 법원 등의 판단은 달랐다. 법무부는 '재반박 답변서'에서 "설령 (국민연금이 합병 투표에서)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하더라도 본건 합병이 여전히 승인될 수 있었다"고도 주장했다. 국민연금이 당시 합병의 캐스팅보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특검은 문 전 장관을 공소장에서 "…삼성그룹 측에서 합병의 성사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캐스팅보트를 갖고 있던 국민연금공단 측에서…"고 주장했다. 법원 판단도 같았다. 2심 재판부는 문 전 장관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국민연금공단은 의결권행사 방향에 따라 이 사건 합병의 성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실상의 캐스팅보트(Casting Vote)를 가지게 되었다"라고 판단했다.
이같은 차이는 향후 엘리엇 ISD 중재판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법무부측은 삼권분립을 근거로 사법부의 판단과 행정부의 입장은 다르다는 논리를 펼칠 수 있다. 앞서 엘리엇 측이 법원 등의 기록을 요구할 때도 법무부는 행정부 소속인 법무부가 사법부에 자료 제출을 강제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판정부는 "본 중재재판의 피청구국은 법무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며 사법부·행정부를 분리하지 않겠다고 못박은 상황이다.
[류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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