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성스러운 그곳에서 각하의 손을 굳게 잡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잊을 수 없고 그날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희망합니다 ···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저와 각하의 또 다른 역사적 만남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전세계가 다시 한번 보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12월 2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쓴 표현이다. 그해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에 이어 이듬해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김 위원장은 이렇게 미북관계 개선에 부푼 기대감을 표시했다.
두 정상이 그간 주고 받은 친서 내용을 포함, 미북 간에 긴박했던 협상 막전막후가 공개됐다. 워싱턴포스트(WP), CNN, 뉴욕타임스(NYT)는 9일(현지시간) '워터게이트' 특종기자인 밥 우드워드의 신간 '격노(Rage)'에 담긴 내용을 입수해 보도했다. 오는 15일 발간 예정인 이 책은 우드워드가 작년 12월 5일부터 지난 7월 21일까지 트럼프 대통령과 18차례에 걸쳐 전화 등을 통해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하고 있다. 두 정상은 겉으로는 깊은 연애를 하는 척을 하면서 물밑에서는 치열한 '밀당'(밀고 당기기)을 벌였음이 확인됐다.
김 위원장은 2018년 말까지만 해도 트럼트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김 위원장은 2018년 12월 친서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9번이나 '각하(Your Excellency)'라고 불렀다. 하지만 다음 해 2월말 열린 하노이 정상회담은 미북 관계를 수렁에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2019년 6월 10일 친서에서 7번 '각하'라는 호칭을 쓰며 관계 복원을 꾀한 모습이 공개됐다. 20일 뒤 판문점 깜짝 회동 이후에 트럼프 대통령은 두 사람의 사진이 실린 뉴욕타임스 1면 사본을 첨부해 보내면서 "오늘 당신과 함께한 것은 정말 놀라웠다"고 적었다. 이틀 뒤 트럼프 대통령은 회동 사진 22장을 또 보내면서 "이 사진들은 나에게 훌륭한 추억이며 당신과 내가 발전시킨 독특한 우정을 담아낸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판문점 회동 이후에 태도가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나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 감정을 당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면서 "나는 정말 매우 불쾌하다"라고 말했다. 군사훈련이 완전히 중단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우드워드는 이를 "실망한 친구나 애인"의 어조로 묘사했다.
2019년 2월 하노이회담의 막전막후도 새롭게 공개됐다. 두 정상은 북한이 어떤 핵 시설을 해체할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모든 장소를 알고 있다. 난 그들 모두를 알고 있다"면서 압박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꿈쩍도 하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 골프 라운드를 하러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핵무기 관계에 대해 "누군가가 집과 사랑에 빠져서 팔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외적으로는 김 위원장과 협상에 나섰지만 궁긍적으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협상에 임해왔음을 보여준다. 그간 진실성을 갖고 협상을 했는지 의문을 드러내는 트럼프 대통령의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과장으로 김 위원장과 친분을 과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케미'에 대해 "당신이 여자를 만난다. 1초만에 일이 진행될지 아닐지 알 수 있다. 10분, 6주가 걸리지 않는다. 1초도 안 걸린다"고 언급했다. 우드워드는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아첨에 마음이 사로잡혔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드워드에게 "김정은은 오바마(전 대통령)를 '개자식(asshole)'로 생각한다"고 말하며 김 위원장과의 관계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책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회담 후에도 두 사람의 사진이 실린 뉴욕타임스 사본에 "위원장님. 멋진 사진이고 훌륭한 시간이었다"고 적어 보냈다. '스트롱 맨' 을 자처하면서도 독재자들에게는 약한 트럼프 대통령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드워드에게 독재자들과 관계를 언급하면서 "내가 가진 관계는 재밌는 일이다. 그들이 더 거칠고 비열할수록 나는 더 잘 지낸다"고 말했다.
[뉴욕 = 박용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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