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실직→소득 급감→빚 연체`…가계發 부실 악순환 시작되나
입력 2020-09-09 17:45  | 수정 2020-09-09 19:27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의 여파로 9일 서울 종로의 식당가가 한산한 가운데 일부 식당은 매출 감소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해 상가를 임대한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충우 기자]
◆ 신용위기 경고등 ◆
#카페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 온 20대 후반 여성 A씨는 최근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일하던 카페 매출과 영업시간이 줄면서 결국 일자리를 잃었다. 당장 필요한 월세와 생활비를 카드론으로 충당하면서 빚이 2000만원으로 불었다. 빚은 늘고 일자리는 없어져 결국 혼자 힘으로 빚을 갚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A씨는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 조정을 신청했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의류 상가를 운영해 온 40대 B씨는 코로나19로 관광객이 감소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지난달 폐업했다. 의류 판매 일당직으로 근근이 생계는 버텼지만, 상가 운영자금으로 받았던 대출에 생활자금까지 총 7500만원에 달하는 빚을 만기 두 달이 지나도록 갚지 못하고 있다.
최근 직장인과 자영업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사업을 접어 소득이 사라지면서 빚을 갚지 못하는 사례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소득은 일자리가 원천인 만큼, 일자리가 위협받으면 부채 상환 능력이 떨어진다.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소수일 때에는 서민금융 등 현재 금융 시스템 내에서 수용이 가능하지만, 채무 불이행이 동시에 급증하면 금융 시스템도 감당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채무자 소득 감소→부채 상환 능력 저하→가계 부실→금융권 부실→신용 시장 경색' 과정으로 이어지는 신용위기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가계부채가 한 달 새 14조원 가까이 불어나고, 특히 신용대출이 7조7000억원이나 폭증한 주요 원인으로는 코로나19 충격에 따른 생계 유지 자금 수요 증가, 주식·부동산 등 자산 시장 활황에 따른 '빚투' 증가 등이 꼽힌다.
한 금융그룹의 A연구위원은 "신용대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고용지표까지 악화하고 있어 대출 부실화에 대한 우려가 크다"며 "특히 직장인들이 한도대출 형태로 받은 대출이 많은데, 일시적 실직 상태가 돼도 대출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부실화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저금리·자산 시장 활황세 영향으로 신용대출을 받아 주식 투자에 나서는 사례도 상당하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주식 투자나 공모주 청약에 필요한 증거금 납입을 위한 대출이 크게 늘었으며, 이미 상장된 주식을 매입하기 위한 증시자금 수요도 대출 증가의 요인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신용대출로 주택 매매자금 수요가 쏠리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신용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했는데 주식 가격이 하락하면 복구가 안 되니까 위험도가 더 크다"며 "가격 변동성이 높은 곳에 투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데, 이런 대출이 더 번진다면 금융회사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6월 말 기준 국내 시중은행들의 원화대출 연체율은 0.33% 수준으로 아직까지는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다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상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유예 조치가 이뤄졌기 때문에 자산 건전 지표 등 숫자만으로는 부실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기존에는 대출이 나간 후 정기적으로 이자를 수취하면서 대출 자산에 대한 모니터링이 이뤄졌는데, 이제는 순전히 감으로 짐작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특히 가장 취약한 계층에 대해 이자 감면 조치가 이뤄졌기 때문에 자산건전성이 얼마나 훼손됐는지 파악하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A연구위원은 "정부의 대출 만기 연장·이자 상환 유예 조치가 끝나는 시점에 부실을 한꺼번에 인식한다면 금융회사들의 건전성 악화 정도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금융정책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도 이 같은 대출 급증세가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가능성에 대해 주시하고 있다. 손병두 금융위 부위원장은 지난 8일 열린 금융리스크대응반 회의에서 "과도한 신용대출이 경제의 리스크 요인이 되지 않도록 선제적 관리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금융위는 금융권의 차주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적절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점검에 들어갔고 신용융자 시장 추이, 은행권 실적 경쟁 등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칫 '생계용' 신용대출을 받는 서민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추가적인 대응에 신중한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신용대출에 대해서는 생계용 자금이 섞여 있기 때문에 문제 소지가 있는 대출에 대해 '핀셋' 대응이 필요하다"며 "금융권 가계대출 흐름을 종합적으로 점검·관리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혜순 기자 / 정주원 기자 / 송민근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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