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20년刑 선고 받은 효창동 묻지마 살인범의 황당한 살인동기
입력 2020-08-22 07:49  | 수정 2020-09-01 15:00
서울서부지방법원 전경. [사진출처 = 홈페이지 캡쳐]

길을 가던 연인에게 아무 이유 없이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1명을 다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효창동 연인 피습 사건' 피고인 50대 남성 배 모씨(54)에게 법원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배씨는 범행 이유에 대해 "현 정권의 정책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고 진술한 것으로 조사됐다. 배씨의 '묻지마 살인'에 피해 남성인 A씨는 꽃다운 30대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고, 그와 약혼 관계였던 여성 B씨는 전치 6주의 상해를 입은 후 여전히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다.
지난 19일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이대연 부장판사)는 살인, 특수상해 혐의로 기소된 배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현 정권 정책에 화가 난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피해자에게 고의로 시비를 걸었고 피해자들이 대응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음에도 쫓아가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배씨 측이 주장한 살인의 고의성이 없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배씨가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며 형의 감경을 요청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건은 지난 1월 26일 발생했다. 배씨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A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이를 말리는 B씨를 폭행해 다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배씨는 일부러 A씨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 차례 밀치며 시비를 걸었고 이후 자기 집으로 돌아가 흉기를 가지고 나온 뒤 뒤쫓아가 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동안 배씨 측은 경찰·검찰 조사 및 재판 과정에서 A씨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범행 당시 살인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단순히 겁을 줘서 사과를 받으려고 칼을 들고 쫓아갔다는 것이다. 배씨는 "그러다 A씨와 논쟁 과정에서 다툼이 벌어져 A씨가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범행 당시 자신이 분노조절, 양극성 장애를 갖는 심신미약 상태였다며 형의 감경을 요청했다. 배씨 측은 '(배씨가) 사물변별능력, 의사결정능력 등이 미약하다고 추정된다'는 전문의 정신감정 소견 등도 제출했다.
하지만 이러한 배씨 측 주장을 재판부는 모두 배척하며 유죄로 인정했다. 우선 재판부는 배씨의 살인 고의성이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집 앞까지 쫓아온 피고인을 보고 뒷걸음질하는 A씨 등에게 피고인은 손을 뻗어 다가갔고 A씨가 제지를 위해 발길질을 하자 오른손 칼로 A씨의 몸통을 향해 찌르듯이 내지른 사실이 확인된다"며 "이후 A씨가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 자세로 일어나면서 상체가 피고인 쪽으로 기울었고 2초간 발버둥 치다가 움직임이 멈췄다. 바닥으론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 "몸싸움 도중 우연히 칼에 찔린 것이라면 A씨가 바닥에 피를 흘려 움직이지 못한다면 매우 놀라고 당황했어야 하는데 피고인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며 "오히려 옆에 서 있던 B씨의 얼굴을 주먹으로 2회 때리고 유유히 범행 현장을 떠났다"고 말했다.
부검 소견에 의하면 흉기는 A씨의 왼쪽 가슴을 관통해 19cm 가량 들어갔다고 한다. 재판부는 이를 토대로 A씨의 신체에 방어흔, 저항흔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칼에 관통 당하고 즉시 항거 불능 상태가 됐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배씨가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에 대해선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현상은 정상인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형 감형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범행 이후 구체적으로 기억하며 진술을 했고 또 법정에선 처음엔 범행 사실을 인정하다가 CCTV 증거조사 후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장면이 명시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진술을 번복했다"며 "특별한 이유 없이 불만을 품은 피고인이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극단적 범행으로 나아간 것이지 정신병 증세로 의사를 결정하지 못한 미약 상태에서 범행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끝으로 재판부는 양형 이유를 설명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된 유족들은 이 사건의 충격으로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앓고 있고 일상생활 영위를 못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을 부인하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바로 도망치지 않았다거나 A씨가 자신과 몸싸움을 하다가 우발적 사고로 칼에 찔렸다고 하는 등 피해자를 탓하면서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씨는 이전에도 수차례 폭력 범죄를 일으켜 형사처벌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범행도 지난 범죄로 인한 집행유예 기간 중에 발생했다. 판사의 주문이 끝나자 고개를 푹 숙인 배씨는 잠시 후 구치소로 이동했다. 재판을 지켜보던 피해자 지인, 유족들도 눈물을 훔치며 법정을 빠져나갔다.
[차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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