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김부선 “딸 이미소 아빠는 재벌가 유부남, 잔인하게 버림받았다”(전문)
입력 2020-08-18 09:42 
김부선 폭로 사진=DB
배우 김부선이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심경을 토로했다.

김부선 지난 17일 자신의 SNS에 누구나 로망은 있다. 하지만 여배우로 살아가려면 고독을 운명처럼 여기고, 고독을 벗 삼아야 한다고 했다. 즉, 연예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는 거다. 돌이켜보면 선배 충고 틀렸다. 여배우로 성공하려면 세상 무서운 것도 경험하고 이놈 저놈 만나 다양한 사랑도 해보고 깨지고 부딪치고 피 터지는 아픔도 겪어봐야 찐 연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충고 해야 했었다?”라고 적었다.

이어 끼 많은 날라리 20대 나는 외로웠다. 그러다 재벌가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낳았고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유부남이었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것이다”라며 상상도 못 한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본능에만 충실했다. 주연배우에서 단역배우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괜찮다 감사했다 이게 어디냐 난 아이 굶기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미혼모였으니까, 임신 소식을 듣고 아이 아빠는 그랬었다. ‘아이 낳지 마라. 난 책임 못 진다 정 낳겠다면 제주도 고향 가서 낳고 뱃놈을 시키든 해녀를 시키든 하고 난 책임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와 보낸 그 시간 그가 내게 말했던 달콤한 속삭임들과 내게 했던 말들이 그 추억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섬처녀 신인배우를 꼬셔내기 위한 거짓이었다니, 아이 아빠는 그렇게 임신 2개월 때 날 떠났다 그렇게 끝났다. 숨어지내다 만삭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라며 백일이 되는 날 연락 끊긴 미소 아빠는 1년 만에 고향으로 아기 백일을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내왔다. 미소 아빠를 만나고 싶었다.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미소가 4개월이 됐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아이를 내 눈앞에서 어이없이 뺏겼다. 아기를 그에게 의심 없이 넘기고 그렇게 충무여행을 갔다”라고 털어놨다.


더불어 이혼만은 죽어도 못 해준다는 아내가 있고 아들이 둘이다. 그들을 버릴 수 없다. 미안하다. 네가 이 아이 행복을 위해서 아기 미래를 위해서 아기 잊고 살아라. 넌 새 출발 해라. 결혼도 하고 잘 지내려면 돈이 필요할 거다”라며 엄마가 목돈 준다더라. 그렇게 돈 받고 아기 보내고 처녀처럼 내숭 떨고 살다 좋은 남자 만나 가정을 이루라는 말을 했었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아기 아빠에게 피 흘리는 짐승처럼 소리치고 대들었다. 무슨 소리냐 너 미치지 않았느냐. 당장 아기 내놔라 고향 집 당장 내려간다. 내가 씨받이냐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소리치며 사납게 달려들었다”라며 4개월 만에 어처구니없이 생이별을 당했다. 지옥 같은 15개월이 지났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성북동 딸 친가와 아이 아빠 집을 오가며 짐승처럼 그들 집 앞에서 아기 달라고 내아가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신음하고 소리쳤다”라고 폭로했다.

김부선은 15개월 후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 아기를 보내 준다며 그들은 항복했다. 변호사 사무실로 나오라 했다. 아기는 지하주차장에 있다며. 아기 만나기 전 반드시 서명을 해야 한다면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읽어봤고 즉시 서명했다”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이후 자신의 삶을 공개한 뒤 내 딸과 날 물고 뜯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만 돌던지라”라고 덧붙였다.

▶ 김부선 글 전문

누구나 로망은 있다.

연예계 데뷔할 때 오수미 고향 선배는 내게 충고하길 여배우로 살아가려면 고독을 운명처럼 여기고 고독을 벗 삼아야 한다고 했다. 즉, 연예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는 거다.

돌이켜보면 선배 충고 틀렸다. 여배우로 성공하려면 세상 무서운 것도 경험하고 이놈 저놈 만나 다양한 사랑도 해보고 깨지고 부딪치고 피 터지는 아픔도 겪어봐야 찐 연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충고 해야 했었다?

그 시대는 그랬었다. 가장 순수하고 피가 뜨거웠던 끼 많은 날라리 20대 나는 외로웠다. 나는 선배 충고를 따랐고 지독히 고독했다. 그러다 재벌가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낳았고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유부남이었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것이다. 상상도 못 한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본능에만 충실했다.

주연배우에서 단역배우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괜찮다 감사했다 이게 어디냐. 난 아이 굶기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미혼모였으니까.

임신 소식을 듣고 아이 아빠는 그랬었다. 아이 낳지 마라. 난 책임 못 진다. 정 낳겠다면 제주도 고향 가서 낳고 뱃놈을 시키든 해녀를 시키든 하고 난 책임없다. 책임 같은 거 묻지 마라. 청천벽력 같았다. 그와 보낸 그 시간 그가 내게 말했던 달콤한 속삭임들과 내게 했던 말들이 그 추억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섬 처녀 신인배우를 꼬셔내기 위한 거짓이였다니.

아이 아빠는 그렇게 임신 2개월 때 날 떠났다 그렇게 끝났다. 숨어지내다 만삭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종일. 구토와 설사를 했고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사랑하는 내 언니는 달리는 트럭 속으로 날 잡고 울면서 뛰어 들어갔다. 같이 죽자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배신하고 그렇게 눈물로 미소를 낳았다. 백일이 되는 날 연락 끊긴 미소 아빠는 1년 만에 고향으로 아기 백일을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내왔다. 미소 아빠를 만나고 싶었다.

옛말에 씨도둑은 못 한다더니 닮아도 너무 닮았다. 쌍둥이처럼.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미소가 4개월이 됐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그 아이를 내 눈앞에서 어이없이 뺏겼다. 친부들이 아기를 보고 싶어 하니 3일간만 할머니에게 아기 맡기고 친구들과 사냥 여행하러 충무 가자 함께 가자 너도 애 낳고 그간 힘들었을 텐데 좀 쉬고 예기도 좀 하자며 그를 사랑했고 또 믿었기에 고마운 마음까지 생겼었다. 아기를 그에게 의심 없이 넘기고 그렇게 충무여행을 갔다.

하룻밤이 지나고 그의 일행들은 사냥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산속에서 밥 짓고 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아이 아빠는 단둘이 이야기 좀 하자며 찌프차에 날 태워 더 깊은 산속으로 가더니 잠시 후 내리라 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더니 어렵게 말을 했다.

부선아 너는 처녀고 나는 유부남이잖아. 난 이혼만은 죽어도 못 해준다는 아내가 있고 아들이 둘이다. 그들을 버릴 수 없다. 미안하다. 네가 이 아이 행복을 위해서 아기 미래를 위해서 아기 잊고 살아라 넌 새 출발 해라. 결혼도 하고 잘 지내려면 돈이 필요할 거다. 엄마가 목돈 준다더라. 그렇게 돈 받고 아기 보내고 처녀처럼 내숭 떨고 살다 좋은 남자 만나 가정을 이루라는 말을 했었다.

망연자실 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아기 아빠에게 피 흘리는 짐승처럼 소리치고 대들었다. 무슨 소리냐 너 미치지 않았느냐. 당장 아기 내놔라 고향 집 당장 내려간다. 내가 씨받이냐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소리치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는 주저없이 사냥용 엽총 개머리판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퍽하고 쓰러진 내게 총부리를 내 얼굴에 갖다 댔다. 쏴 죽여버린다고 따르라고 어미 자격 없다고. XX년이 감히 누구에게 소리 지르냐며 얼굴형태를 알 수 없게 총으로 맞았고 쓰러진 내게 분이 안 풀렸는지 남자의 손과 등산화 신은 발로 나는 죽도록 맞았다.

간신히 도망쳤다. 눈물로 낳은 아기 내 딸 미소와 나는 그렇게 4개월 만에 어처구니없이 생이별을 당했다. 지옥같은 15개월이 지났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성북동 딸 친가와 아이아빠 집을 오가며 짐승처럼 그들 집 앞에서 아기 달라고 내아기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신음하고 소리쳤다.

15개월 후 악몽같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 아기를 보내 준다며 그들은 항복했다. 변호사 사무실로 나오라 했다. 아기는 지하주차장에 있다며. 아기 만나기전 반드시 서명을 해야한다면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읽어봤고 즉시 서명했다.

그 내용은

1 위자료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2 양육비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3 아이아빠를 다시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내가 오천만원을 지급한다 등등 이였다.

난 주저없이 서명했다. 그게 1990년 봄이였다.

그런 세월이 벌써 30년째다. 그런 지독한 세월을 나쁜 짓 안하고 단역하고 노동하며 딸과 죄인처럼 숨어살았다. 재벌가 아이아빠는 단돈 1원도 지원하지 않았다.

내용증명각서에 서명 했다는 법적 근거로? 그 후 아이아빠는 미국으로 부부여행 떠났고 거기서 또 다시 낯선 여인과 눈이 맞아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했고 딸을 또 낳았다. 충격이 연속이였다.

미혼모의 삶 나홀로 아이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산다는거 결코 녹녹치 않았다. 연예는 사치였다. 미소를 대학까지 보낸 후 내 삶은 책임과 긴장에서 조금 풀렸다. 딸과 조카 나 셋이 살다. 조카애가 독립을 했고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하여 나갔다. 미소도 함께 따라갔다. 그러다 집회현장에서 2007년 12월 중순 발칙한 촌놈 이재명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날 보자마자 매우 적극적이였다. 기분이 좋았다. 여배우라면 한 번씩 꿈꿀법한 로망. 누구의 소개가 아닌 신원이 확실치 않으면 행여 소문날까 두려워 연예한번 폼 나게 못해본 내가 맹바기 꼴보기싫다며 시위하러갔다가 길에서 영화처럼 만난 낯선 남자 이재명은 내게 친절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 딸과 날 물고 뜯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아 너희들 중 죄없는 사람만 돌던지라.

오늘은 여기까지.

MBN스타 대중문화부 안하나 기자 mkculture@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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