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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선 “딸 이미소 아빠는 재벌가 유부남, 잔인하게 버림 받았다”[전문]
입력 2020-08-18 08:06  | 수정 2020-08-18 13:38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향희 기자]
소설가 공지영과 ‘전 남편 음란사진 협박 의혹을 놓고 설전을 벌였던 배우 김부선이 딸 미소의 아빠는 재벌가 유부남”이라고 고백했다.
김부선은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누구나 로망은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장문의 글과 어린 딸을 안고 있는 과거 사진을 공개했다.
김부선은 이 글에서 연예계 데뷔 때 고향 선배는 내게 충고하길 여배우로 살아가려면 고독을 운명처럼 여기고 고독을 벗 삼아야 한다고 했다”며 그러나 여배우로 성공하려면 세상 무서운 것도 경험하고 이놈 저놈 만나 다양한 사랑도 해보고 깨지고 부딪치는 아픔도 겪어봐야 찐(진짜) 연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충고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20대의 나는 외로웠다. 그러다 재벌가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고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유부남이었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것”이라며 상상도 못 할 일이 현실이 됐다. 주연배우에서 단역배우로 순식간에 전락했지만 그래도 항상 감사했다”고 돌아봤다.

특히 아이 아빠에 대해 강한 원망을 드러냈다. 임신 소식을 듣고 아이 아빠는 그랬었다. ‘아이 낳지 마라. 난 책임 못 진다 그와 보낸 그 시간들, 그가 내게 했던 달콤한 속삭임들과 내게 했던 말들이. 그 추억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섬처녀 신인 배우를 꼬셔내기 위한 거짓이었다”며 그렇게 임신 2개월 때 남자가 떠났다. 눈물로 미소를 낳았다”고 전했다.
백일이 되는 날 연락이 두절 된 미소 아빠는 1년 만에 고향으로 아기 백일을 축하한다면 축전을 보냈다”고 밝힌 김부선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딸이 4개월 됐을 때 서울로 상경했지만 남자의 거짓말에 딸을 눈 앞에서 뺏겼다”고 했다.
김부선은 아이 아빠는 친구들과 사냥 여행을 가서 나를 산 깊은데 데려가 ‘이혼 못 해준다. 아이 잊고 새 출발해라 ‘엄마가 목돈 준다더라. ‘돈 받고 아기 보내고 처녀처럼 내숭 떨고 살다 좋은 남자 만나 가정을 이루라고 했다. 망연자실이었다. 처음으로 아이 아빠에게 대들었다. 이후 사냥용 엽총으로 두들겨 맞았고, 퍽하고 쓰러진 내게 총부리를 내 얼굴에 갖다댔다. 쏴 죽여버린다고 따르라고 어미 자격 없다고. 쓰러진 내게 분이 안풀렸는지 남자의 손과 등산화 신은 발로 나는 죽도록 맞았다. 간신히 도망쳤다. 지옥 같은 15개월을 보낸 뒤 그집을 미친 듯이 찾아간 끝에 미소를 되찾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위자료, 양육비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다는 김부선은 재벌가 아이 아빠는 단돈 1원도 지원하지 않았다”며 나홀로 아이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산다는 거 결코 녹녹지 않았다. 미혼모의 삶에 연애는 사치였다. 그러다 집회 현장에서 2007년 12월 중순 발칙한 촌놈 이재명을 만났다”고 말했다.
김부선은 그는 날 보자마자 매우 적극적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여배우라면 한 번씩은 꿈꿀 법한 로망”이라며 시위하러 갔다가 길에서 영화처럼 만난 낯선 남자 이재명은 내게 친절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고 떠올렸다.
그는 내 딸과 날 물고 뜯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아. 너의들 중 죄 없는 사람만 돌던지라.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며 글을 마무리했다.
▶ 다음은 김부선 글 전문
누구나 로망은 있다.
연예계 데뷔할 때 오수미 고향 선배는 내게 충고하길 여배우로 살아가려면 고독을 운명처럼 여기고 고독을 벗 삼아야 한다고 했다. 즉, 연예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는 거다.
돌이켜보면 선배 충고 틀렸다. 여배우로 성공하려면 세상 무서운 것도 경험하고 이놈 저놈 만나 다양한 사랑도 해보고 깨지고 부딪치고 피 터지는 아픔도 겪어봐야 찐 연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충고 해야 했었다?
그 시대는 그랬었다. 가장 순수하고 피가 뜨거웠던 끼 많은 날라리 20대 나는 외로웠다. 나는 선배 충고를 따랐고 지독히 고독했다. 그러다 재벌가 남자를 만났고 아이를 낳았고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유부남이었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것이다. 상상도 못 한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본능에만 충실했다.
주연배우에서 단역배우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괜찮다 감사했다 이게 어디냐. 난 아이 굶기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미혼모였으니까.
임신 소식을 듣고 아이 아빠는 그랬었다. 아이 낳지 마라. 난 책임 못 진다. 정 낳겠다면 제주도 고향 가서 낳고 뱃놈을 시키든 해녀를 시키든 하고 난 책임없다. 책임 같은 거 묻지 마라. 청천벽력 같았다. 그와 보낸 그 시간 그가 내게 말했던 달콤한 속삭임들과 내게 했던 말들이 그 추억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섬 처녀 신인배우를 꼬셔내기 위한 거짓이였다니.
아이 아빠는 그렇게 임신 2개월 때 날 떠났다 그렇게 끝났다. 숨어지내다 만삭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종일. 구토와 설사를 했고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사랑하는 내 언니는 달리는 트럭 속으로 날 잡고 울면서 뛰어 들어갔다. 같이 죽자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배신하고 그렇게 눈물로 미소를 낳았다. 백일이 되는 날 연락 끊긴 미소 아빠는 1년 만에 고향으로 아기 백일을 축하한다는 축전을 보내왔다. 미소 아빠를 만나고 싶었다.
옛말에 씨도둑은 못 한다더니 닮아도 너무 닮았다. 쌍둥이처럼.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미소가 4개월이 됐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그 아이를 내 눈앞에서 어이없이 뺏겼다. 친부들이 아기를 보고 싶어 하니 3일간만 할머니에게 아기 맡기고 친구들과 사냥 여행하러 충무 가자 함께 가자 너도 애 낳고 그간 힘들었을 텐데 좀 쉬고 예기도 좀 하자며 그를 사랑했고 또 믿었기에 고마운 마음까지 생겼었다. 아기를 그에게 의심 없이 넘기고 그렇게 충무여행을 갔다.
하룻밤이 지나고 그의 일행들은 사냥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산속에서 밥 짓고 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아이 아빠는 단둘이 이야기 좀 하자며 찌프차에 날 태워 더 깊은 산속으로 가더니 잠시 후 내리라 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더니 어렵게 말을 했다.
부선아 너는 처녀고 나는 유부남이잖아. 난 이혼만은 죽어도 못 해준다는 아내가 있고 아들이 둘이다. 그들을 버릴 수 없다. 미안하다. 네가 이 아이 행복을 위해서 아기 미래를 위해서 아기 잊고 살아라 넌 새 출발 해라. 결혼도 하고 잘 지내려면 돈이 필요할 거다. 엄마가 목돈 준다더라. 그렇게 돈 받고 아기 보내고 처녀처럼 내숭 떨고 살다 좋은 남자 만나 가정을 이루라는 말을 했었다.
망연자실 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아기 아빠에게 피 흘리는 짐승처럼 소리치고 대들었다. 무슨 소리냐 너 미치지 않았느냐. 당장 아기 내놔라 고향 집 당장 내려간다. 내가 씨받이냐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소리치며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는 주저없이 사냥용 엽총 개머리판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퍽하고 쓰러진 내게 총부리를 내 얼굴에 갖다 댔다. 쏴 죽여버린다고 따르라고 어미 자격 없다고. XX년이 감히 누구에게 소리 지르냐며 얼굴형태를 알 수 없게 총으로 맞았고 쓰러진 내게 분이 안 풀렸는지 남자의 손과 등산화 신은 발로 나는 죽도록 맞았다.
간신히 도망쳤다. 눈물로 낳은 아기 내 딸 미소와 나는 그렇게 4개월 만에 어처구니없이 생이별을 당했다. 지옥같은 15개월이 지났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성북동 딸 친가와 아이아빠 집을 오가며 짐승처럼 그들 집 앞에서 아기 달라고 내아기 내놓으라고 울부짖고 신음하고 소리쳤다.
15개월 후 악몽같은 시간이 지나 드디어 내 아기를 보내 준다며 그들은 항복했다. 변호사 사무실로 나오라 했다. 아기는 지하주차장에 있다며. 아기 만나기전 반드시 서명을 해야한다면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읽어봤고 즉시 서명했다.
그 내용은
1 위자료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2 양육비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3 아이아빠를 다시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 내가 오천만원을 지급한다 등등 이였다.
난 주저없이 서명했다. 그게 1990년 봄이였다.
그런 세월이 벌써 30년째다. 그런 지독한 세월을 나쁜 짓 안하고 단역하고 노동하며 딸과 죄인처럼 숨어살았다. 재벌가 아이아빠는 단돈 1원도 지원하지 않았다.
내용증명각서에 서명 했다는 법적 근거로? 그 후 아이아빠는 미국으로 부부여행 떠났고 거기서 또 다시 낯선 여인과 눈이 맞아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했고 딸을 또 낳았다. 충격이 연속이였다.
미혼모의 삶 나홀로 아이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산다는거 결코 녹녹치 않았다. 연예는 사치였다. 미소를 대학까지 보낸 후 내 삶은 책임과 긴장에서 조금 풀렸다. 딸과 조카 나 셋이 살다. 조카애가 독립을 했고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하여 나갔다. 미소도 함께 따라갔다. 그러다 집회현장에서 2007년 12월 중순 발칙한 촌놈 이재명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날 보자마자 매우 적극적이였다. 기분이 좋았다. 여배우라면 한 번씩 꿈꿀법한 로망. 누구의 소개가 아닌 신원이 확실치 않으면 행여 소문날까 두려워 연예한번 폼 나게 못해본 내가 맹바기 꼴보기싫다며 시위하러갔다가 길에서 영화처럼 만난 낯선 남자 이재명은 내게 친절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 딸과 날 물고 뜯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아 너희들 중 죄없는 사람만 돌던지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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