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한꺼풀 글로벌 와인도 원유처럼…유럽 명품 와이너리, 전격 감산회의
입력 2020-08-13 11:41  | 수정 2020-08-14 12:07
[사진 제공 = 모엣샹동]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몰라. 남들은 특별한 날에만 샴페인을 즐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나는 프랑스산 샴페인을 궤짝으로 즐기며 삶을 만끽할 수 있어"
넷플릭스 시리즈 '라카사데파펠'의 주인공, 희귀병에 걸린 '베를린'이 자신의 결혼식에 온 동생에게 하는 말입니다. 비록 오래 살진 못하지만 대신 매일 매일 현재를 즐기는 '카르페디엠'의 날들을 살아가기에 짧은 생이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얘기입니다.
전세계로 퍼진 프랑스산 고급 샴페인은 기쁨의 상징입니다. 결혼식이 가장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생일을 비롯해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등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의 시대엔 어떨까요 ?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만날 수 없고, 어쩐지 나만 그런게 아니라 남들도 우울해보이는 분위기 탓인지 샴페인 마실 일도 줄어들었나봅니다. 오는 18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는 와인 제조업체에 포도를 납품하는 농장 주인들이 모여 '감산회의'를 연다고 합니다. 지난 10일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는 와인 제조·포도업자들이 먼저 감산 보조금 신청을 마쳤습니다.
올해는 날씨가 완벽에 가깝도록 좋은 특별한 해여서 포도 수확을 평소보다 이른 시기에 할 수 있었는데,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쓸면서 사정이 달라진 셈입니다. 전세계 와인 생산을 주도하는 유럽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글로벌 시장의 원유 카르텔' 석유 수출국기구(OPEC)같은 생산량 조절 관행이 있는데, 코로나19 시대에는 이례적으로 감산에 나섰다고 합니다. 와인·샴페인 양조장 지하실에 재고 10억 병이 쌓여있다보니 생산을 더 늘리기 힘든 탓입니다.
[사진 제공 = 모엣샹동]

프랑스에서는 '왕들의 도시'로 불리는 랭스 지역과 '샴페인의 수도' 에페르네 지역 와인 마을에는 1940년대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가장 짙은 근심이 드리웠다고 합니다. 수도 파리 북동쪽에 있는 랭스는 오래 전 프랑스 국왕들의 왕관 수여식이 열린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곳이고, 프랑스 동북부 샹파뉴의 작은 도시 에페르네는 샴페인의 고향입니다. 샴페인이라는 이름은 샹파뉴 내 허가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 프랑스 CGT샴페인 포도 재배 연합회 회장을 지낸 샴페인 제조업자 베르나르 볼리유씨는 12일 BBC인터뷰에서 "코로나19 탓에 샴페인 매출 감소가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볼리유씨는 오는 18일 샴페인용 포도 생산량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1만5000명의 농장·제조업 관계자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프랑스 샴페인은 독특하게 '단일 생산량' 규칙을 따른다고 합니다. 모든 포도 농장들이 1헥타르 당 같은 양의 포도만 수확해야 한다는 원칙인데, 남는 포도는 밭에 둬 썩게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비축용'으로 냉장보관하는 식입니다.
이탈리아 고급 와인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왼쪽)과 키안티 클라시코 [사진 제공 = 각 사]
OPEC의 원유 감산량 합의 과정이 쉽지 않은 것처럼 포도도 그렇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위기이다보니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포도를 사가는 샴페인 제조업체들과 포도를 내다파는 농장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린다고 합니다. 제조업체 중에서는 샹파뉴 지역에 기반한 볼랑저와 크루그, 랭스 지역에 기반한 멈이 유명한데, 샴페인 제조자 협회인 메죵드샹파뉴(UMC)는 포도 농장들이 '1헥타르에 7000킬로그램(kg)'만 수확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포도 7000kg는 샴페인 200병을 생산할 수 있는 양인데, 협회가 포도 수확량이 줄어들기 바라는 이유는 샴페인 수백만 병이 팔리지 않은 채 재고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재고 유지 비용 부담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제조업계는 지난 해에 비해 올해 샴페인은 1억 병이 덜 팔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금액으로 따지면 17억 달러만큼 매출이 줄어드는 셈입니다. 이 때문에 루이뷔통모엣헤네시 그룹의 유명한 샴페인 모엣샹동과 돔 페리뇽은 올해 포도 수확이 지난 해보다 40%줄어들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도 농장들은 반대입니다. 농장들은 '1헥타르에 8500kg' 수확량을 바란다고 합니다. 이것보다 적게 수확하면 손해가 막심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 샴페인 재고가 쌓이고는 있지만 올해 기후가 좋은 덕에 워낙 좋은 포도들이 출하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옆 나라 이탈리아로 가볼까요 ? 여기도 프리미엄 와인 수요가 줄어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고급 호텔과 식당들이 줄줄이 문 닫고 관광객 발길이 끊기면서 와인업계는 올해 수출이 작년보다 10억 유로 줄어들 것이라고 봤는데 매출로 따지면 9%가 줄어드는 셈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 탓에 수도 로마에서는 포도주 목표 생산량을 지난 해보다 5%줄이기로 하고 와인 제조업체들에게 감산 지원금 총1억 유로(약 1398억 3000만 원)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제조업자들이 포도를 15~50%폐기한다는 것이 지원 조건인데 지난 10일 신청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토스카나 정부도 와인 재고 조절을 위해 감산 지원금 600만 유로(약 83억 9000만원)를 배정했습니다.
이탈리아 역시 포도 수확량을 줄인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일례로 고급 와인으로 유명한 토스카나 지역의 키안티 클라시코와 베네토 지역의 '스파클링와인' 프로세코가 자신들에게 납품하는 포도 농장들이 생산한 포도를 폐기하는 조건으로 농장에게 1헥타르 당 1100유로를 지원하는 식으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시에나 지역에서 생산되는 '1병에 최대 200유로짜리 고급 와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도 포도 납품 농장들과 포도 수확량을 12.5%줄이기로 했다고 합니다. 현재로선 올해 몬탈치노 판매량이 지난해의 반토막으로 줄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삶의 축제'를 상징하는 고급 와인과 샴페인의 시대도 저물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이와 관련해 BBC는 역사를 보면 와인 산업은 전쟁과 혁명, 불황을 지나온 300년 동안 결국 강세를 보여왔다고 전했습니다. 세상이 조금 더 즐거워진다면 어떨까요?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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