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조수 고용은 관행" vs "법적 무죄, 도덕적 유죄"…조영남 화투 그림 대작 무죄 판결 파장
입력 2020-06-25 14:20 
가수 조영남의 작품 `병마용갱`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화투 그림 대작(代作) 사건으로 4년 간 법정에 섰던 가수 조영남 씨(75)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25일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조씨의 사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번 사건에선 기술 보조를 통해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을 구매자들에게 사전 고지할 의무가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미술작품 거래에서 보조자를 사용해 제작됐는지 여부가 구매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피해자들은 '조영남 작품'으로 인정받고 유통되는 상황에서 구입했고, 조씨가 위작·저작권 시비에 휘말린 것도 아니었다"고 판시했다. 또 "위작·저작권 다툼이 없을 때는 미술작품 가치 평가는 전문가 의견을 존중해 사법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로 '현대미술에서 조수 고용은 관행'으로 자리잡겠지만 '아이디어만 좋으면 그림을 대필시켜 팔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게 돼 미술계 후폭풍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혼자서 완성하기 힘든 대형 조각이나 설치미술과 달리 '회화에는 작가의 영혼과 손길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통 미술관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미술은 과연 무엇인지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고 할 만큼 파장이 크다.
현재 화랑가와 전문가들은 조씨의 무죄 판결에 상반된 견해를 내놓으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먼저 영국 유명 설치미술가 데미안 허스트와 미국 조각 거장 제프 쿤스는 대규모 조수 사단을 거느리고 공장 규모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기에 회화 작가의 대필도 문제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현대 개념미술에서 작가는 작품 주제와 디자인 도안을 창조하는 주체로 세부 제작을 관련 분야 장인들에게 맡기는 관행이 정착돼 있다.
`그림대작` 가수 조영남, 무죄 최종 확정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찬규 학고재 갤러리 회장은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현대미술에서 조수를 쓰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최열 미술평론가도 "작품이 잘 팔리는 인기 회화 작가들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조수에게 상당 부분 작업을 맡긴다. 조씨가 그림 실력이 없어서 대필 작가에게 맡긴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며 "조씨가 미술 전공자가 아니어서 화단의 배척을 받은 측면도 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만 작가가 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법적으로 무죄이지만 도덕적·윤리적으로는 유죄"라고 비판하는 미술 전문가들도 상당하다.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송모씨에게 1점당 10만원을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하고, 본인이 약간 덧칠한 뒤에 서명을 넣어 17명에게 1억5350만원에 판매한 혐의로 기소됐다.
손성례 청작화랑 대표는 "조씨가 대필 작가 그림을 수백만원 대에 판 것으로 안다. 연예인이 유명세를 앞세워 대필 작가를 고용해 사인만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면 화단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유통 질서를 어지럽히게 된다. 회화 작가는 손 떨릴 때까지 직접 그려야 한다. 작가의 영혼이 없는 그림은 작품이 아니다"고 쓴소리를 했다.
특히 캔버스 앞에서 나홀로 사투를 벌이는 전업 작가들의 상실감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씨의 화투 그림을 현대 설치미술이나 조각, 개념미술과 동급으로 볼 수 없다는 비판도 이어진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조씨가 개념미술의 출발인 미니멀리즘이나 팝아트의 계보를 잇는 것도 아니며, 그 맥락에서 작업해왔다는 심증도 없다. 최근 회자되는 '조영남=개념미술'의 등식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라며 "대작이 관행이고 동시대 미술의 당연한 흐름이라면 조씨는 왜 그동안 '예술혼을 쏟아부었다'며 자신이 다 그린 것처럼 했을까"라고 반문했다. 또한 "대작 작가에게 그림 한 점당 10만원을 준 것은 노동력 착취이자 열정 페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이 사기죄로 조씨를 기소했지만 사기의 '피해자'라고 조씨를 고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16년 송모씨가 "가수 조영남이 그린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라고 폭로한 이후 검찰 수사로 이어져 지금까지 재판이 진행됐다. 2017년 1심 재판부는 "사실상 송씨의 창작 행위로 봐야하며 대작 화가가 있다는 점을 구매자에게 알리지 않았다"며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명했다. 반면 2심은 "송씨는 조씨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 보조"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그림을 구입한 사람들이 예술성과 상관없이 가수 조영남의 작품이어서 산 것이다. 연예인이 쓰던 안경이나 시계 같은 소장품으로 조용남 그림을 인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 성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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