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한미보다 미일동맹이 우선"…볼턴 회고록이 드러낸 불편한 진실
입력 2020-06-24 10:20  | 수정 2020-07-01 11:37

한국과 일본의 이익이 상충할 때 미국은 두 동맹 중 어느 나라를 지지하게 될까.
마치 가족이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지를 묻는 우문이지만 존 볼턴의 회고록을 보면 미국의 선택은 분명해 보인다.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회담과 한·미회담, 한일 간 반도체 수출규제 갈등 등 중요 사건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일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반면 한국을 상대로 수용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북한에 이어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 외교 현안인 대이란 문제에 아베를 끌어들였다. 아베를 상대로 "미·이란 관계 개선의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고 절박하게 요청한 사실이 회고록에서 확인됐다. 트럼프 시대에서 아베의 글로벌 외교력을 확장시켜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베에 내밀한 도움을 요청한 트럼프는 일본의 도발로 반도체 핵심소재 분쟁이 불거지자 "한·일 간 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며 우리 정부의 중재 요청을 무시했다.

이처럼 한미일 동맹의 삼각축에서 미국이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존 볼턴의 회고록은 "한국보다 일본에 더 우선순위가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의 회고록 내용에 대해 청와대는 일단 왜곡과 허위, 과장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향후 한·일 간 다시 중대한 이익 충돌이 발생했을 때 미국의 중재와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한국 외교가 어떤 노력과 전략을 구사할지에 대해 볼턴의 회고록은 역설적으로 그 필요성과 사안의 중대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향후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에서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훼방을 놓고 한·미 간 내밀한 정보들을 캐내는지에 대해서도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볼턴의 회고록은 입증하고 있다. 힘과 정보의 대결인 외교전에서 일본의 대미 전략은 혀를 내두를 만큼 헌신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회고록은 보여준다.
◆2018년 文·金 회담 앞두고 美, 韓에는 "비핵화 논의 말라"···日에는 중요정보 실시간 제공
2018년 4월 11일. 미국 워싱턴 DC 인근 델러스 국제공항에 청와대 고위 인사가 도착했다.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예정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현안을 공유하기 위해 방미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었다.
도착 다음날 정 실장과 만난 볼턴은 뜻밖의 요구를 내놓는다. 27일 남북 회담 때 대화 테이블에 '비핵화'를 올려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역사적 회동을 하는 한국을 상대로 가장 중요한 의제인 비핵화 문제를 다루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회담을 하지 말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물론 4월 27일 정상회담 뒤 양국 정상은 공동 선언문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비핵화를 천명해 볼턴의 주장이 무색하게 됐다.
결과를 떠나서 볼턴은 정 실장에게 대체 왜 이런 무리한 요구를 했을까. 그의 회고록을 보면 한마디로 한국은 미국이 지향하는 북한 비핵화 개념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회고록에서 볼턴이 당시 상황을 메모한 내용이다.
【"미국이 말하는 북한의 비핵화 개념에 대한 한국의 이해수준은 미국의 근본적 국익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4·27 판문점 회담은 실체가 없는 위험한 연극일뿐이다. 나는 정의용에게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를 논의하는 걸 피하라고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양이 가장 선호하는 외교전략인 한국과 일본, 미국 간 관계를 틀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말했다. 북한이 한국과 미국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주 정교한 조정을 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볼턴 회고록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사실은 당시 한미 정상 간 판문점 회담에 개입하고 정보를 캐내려는 일본의 노력이 집요했다는 사실이다.
볼턴은 이날 정 실장을 만난 뒤 수 시간 뒤 야치 쇼타로 당시 일본 국가안보국장을 만나 정 실장이 전한 남북회담 내용을 사실상 실시간으로 전했다.
극렬 매파인 볼턴은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일본 정부와 동일하다는 점을 수시로 언급하며 당시 야치에게 전한 메시지가 아베에게 그대로 전달됐다고 말하고 있다.
며칠 뒤 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가 트럼프에게 자신의 메시지와 동일한 내용으로 북한 비핵화 해법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고도 했다.
한미 간 판문점 회담을 앞두고 아베가 트럼프에게 다양한 조언을 하며 입김을 넣은 것이다. 볼턴이 메모한 당시 상황은 아래와 같다.
【(정 실장 만남 후) 나는 야치와 만났다. 그는 최대한 빨리 나를 통해 문재인과 김정은 간 1차 남북 회담에 대한 관점을 듣고 싶어했다. 도쿄의 관점은 한국의 관점과 180도 다른 것이면서, 내 생각과는 완전히 같았다. 야치는 북한의 핵무장이 확인된 것이고 이 문제를 풀 때 (북한이 원하는) 단계적 주고받기 협상을 일본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무기 해체 기간은 트럼프와 김정은 간 합의에 따라 즉시 시작돼 2 년 내에 완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는 리비아 비핵화에서 경험을 근거로 야치에게 "핵무기 해체는 '6~9 개월' 내에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야치는 이 말에 웃기만 했다. 그런데 그 다음 주 아베가 마라라고 리조트(트럼프 별장)에서 트럼프를 만났을 때 "북한의 핵폐기는 6~9 개월 안에 끝나야 한다"고 말하더라.(야치가 자신의 발언을 아베에게 보고하고, 아베가 이를 다시 트럼프에게 일본의 입장처럼 얘기했다는 뜻)】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북한 비핵화에 대해 다양한 옵션을 검토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아베 총리는 볼턴의 강경한 입장을 그대로 일본의 공식입장으로 전달한 셈이 됐다.
이는 아베 정권이 트럼프와 접촉에 앞서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 내 강경파 메시지를 취합해 트럼프의 대북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볼턴은 4월 27일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공동 선언문이 발표되자 회고록에서 이를 "DMZ에서 열린 4·27 축제는 올리브 가지만 잔뜩 있고 거의 실체가 없었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회담 전 정 실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북한과 비핵화 문제를 다루지 말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회담 결과가 나오자 실체가 없다는 식으로 트럼프에게 보고했던 게 평소 대북협상 무용론을 주장해온 볼턴의 일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트럼프, 아베에 중동외교 해결 부탁···日 영향력은 키워주고, 한일 수출규제 문제는 외면
지난해 7월 1일. 일본은 한국을 겨냥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EUV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했다. 어느 나라가 봐도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노역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적 성격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응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를 포함한 초강경 대응에 나서는 한편 외교력을 가동해 미국의 중재를 요청했다.
과연 미국이 일본의 무역보복 도발행위에 대해 어떤 중재 움직임을 보일지 여부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러나 당시 트럼프의 대응은 이런 기대가 무색하게 사실상 방관자 역할로 끝났다.
당시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 대통령이 내게 관여(involved)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며 "만약 그들(문 대통령·아베 총리) 모두가 내가 관여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모호한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이번 볼턴 회고록을 보면 트럼프는 문 대통령에게 이미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의 비개입 원칙이 확인되면서 그의 참모들도 한일 갈등에 개입할 여지가 확연히 줄었다는 게 회고록의 내용이다.
아래는 볼턴이 메모한 관련 내용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문 대통령에게 분쟁(dispute)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보였다. 연기를 피우며 커지려 하는 이 문제는 나쁜 뉴스였다. 일본 외무성은 홈페이지에서 한국에 대한 '전략적 동맹' 표현을 삭제했다. 트럼프의 무관심(disinterest)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의용 실장에게 한·일 양국이 한 달 간 스탠드스틸(추가 보복조치 전면동결) 협약을 맺기를 제안했다.】
볼턴의 중재 결과 일본은 수출규제 문제를 풀기 위한 양국 국장급 대화 재계를 결정했고, 한국 정부는 이에 화답해 지소미아 조건부 연장을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관여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직접 개입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볼턴 회고록을 보면 트럼프는 당시 아베에게 외교적 채무관계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북핵문제에 이어 이란 문제에서도 해결의 모멘텀을 찾으려 했고, 이란과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베에 SOS를 친 것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지난해 5월 트럼프는 일본을 국빈방문하면서 아베에게 이란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언급하며 자신을 대신해 아베가 이란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를 아베가 수락해 6월 12일 마침내 아베의 이란 방문이 성사됐다.
당시 일본 매체들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국과 이란 관계가 극도로 악화하자 아시아 국가 중 전통적으로 이란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일본이 관계 개선의 중재자로 부상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다만 기대와 달리 아베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와 회동하고도 트럼프가 원하던 협상의 물꼬를 트지 못했다.
또 아베의 이란 방문 기간인 6월 13일 일본과 관련된 2척의 유조선이 피격을 당하는 사건마저 터졌다.
그럼에도 아베가 트럼프 특사를 자처하면서 트럼프의 신뢰를 얻었다. 그 결과 아베는 올해 1월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오만 등 중동 3국을 방문했다.
모두 이란과 미국의 관계개선 및 경제 제재 해제를 원하지 않는 국가들로, 볼턴 회고록을 보면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는 미국과 이란의 관계 개선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작년 6월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충성스러운 특사 역할을 수행 중인 아베를 상대로 트럼프가 느끼는 고마움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하반기 일본의 일방적인 수출규제 보복조치와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대응 문제에서 트럼프에 심판 역할을 요청한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볼턴의 회고록은 받아들이기 불편할 만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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