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91살 6.25 참전용사의 당부 "다시는 이런 일 없어야지"
입력 2020-06-16 08:04  | 수정 2020-06-23 08:05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지요."

올해 91살 황병태(대구시 동구)옹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됐다는 말에만 감이 교차하는 듯 착잡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1929년 10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황 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만 23살에 다소 늦은 나이로 공군에 입대했습니다.

경남 진주에 살던 황 옹은 징집 명령이 내려오자 주저 없이 나라의 부름에 응했다고 말했습니다.

대구에 있는 공군 기지에 배속된 황 옹은 간단한 기본 훈련을 받고 곧장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주된 임무는 출격하는 아군 전투기를 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군 주력 비행기인 F-80, F-86 세이버 전투기는 물론 대한민국 공군 최초 전투기인 F-51 등에 기관총을 달고 실탄을 장전했습니다.

엄청나게 무거운 로켓포를 장착하는 일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공습이 잦은 날에는 불과 몇 분 간격으로 전투기가 이륙해 온종일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공습이 뜸한 날에는 항공기 정비까지 맡아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직접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나라를 구하는 일에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힘들 때면 자신보다 조금 앞서 육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한 고향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버텼습니다.

8개월가량 온 힘을 다한 끝에 전쟁이 멈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후 8년을 더 공군에 몸담고 있다가 1961년 제대한 뒤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새 인생을 설계하려고 했습니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친구를 따라 화신백화점 7층 영화관을 드나들며 사업 구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군에서 전투기 무장과 정비 등을 맡아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공군 측은 황 옹이 수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에 있던 가족을 먼저 대구로 데려가야 할 만큼 사정이 절실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기 짝이 없지만 당시 공군은 대구기지(K-2)에 대규모 시설을 만들면서 전투기 정비·무장 분야 베테랑이던 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또한 나라의 부름이라고 생각한 황 옹은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군무원으로 23년을 근무하고 1985년 정년으로 퇴임했습니다.

퇴임 후 15년간 6.25참전유공자회 대구 동구지회장을 맡다가 2017년부터 대구시 지부장으로 참전 용사를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8년 국가유공자법 제정 당시 국회의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법 통과를 위해 애쓴 일에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유공자 한 사람당 참전수당 33만 원을 매달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참전수당 외에 각 자치단체가 주는 명예수당이 제각각인 점은 불만입니다.

황 옹이 사는 대구에서는 참전용사가 매달 8만 원씩 받지만 20만∼30만 원대 수당을 주는 지역도 있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금전 욕심보다 대구에 참전 유공자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는 것입니다.

현재 대구에 생존하는 6.25 참전유공자는 3천500명 안팎입니다.

고령인 탓에 해마다 300∼400명이 세상을 등져 10년 후엔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그는 예상했습니다.

몸소 겪은 6.25 전쟁 참상을 증언할 사람이 점점 사라지면 전후 세대가 확고한 안보관을 정립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고도 했습니다.

황 옹은 "같은 핏줄끼리 더는 싸우지 말고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70년 전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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