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38명 목숨 앗아간 이천 화재는 '인재'였다…"용접 작업중 발화"
입력 2020-06-15 14:43  | 수정 2020-06-22 15:05
38명이 숨진 경기 이천 물류창고 공사 현장 화재 참사는 안전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채 용접작업을 하다가 불티가 가연성 소재에 튀면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특히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해 당초 예정보다 두배 많은 인력을 현장에 한꺼번에 투입한데다 결로를 막겠다며 대피로까지 폐쇄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화재 원인을 수사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오늘(15일) 경기 이천경찰서에서 가진 중간수사 결과 발표에서 "이천 화재는 공사장 지하 2층에서 용접 작업 중 발생한 불티가 가연성 소재인 건물 천장의 벽면 우레탄폼에 튀어 불길이 치솟은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사고 발생 48일만에 나온 경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이번 이천 물류창고 화재도 공사현장 곳곳에서 안전을 무시해 빚어진 '인재'로 드러난 것입니다.


경찰은 소방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전기안전공사, 한국가스안전공사, 고용노동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등 7개 기관과 4차례에 걸쳐 진행한 합동 감식 등을 통해 이번 화재가 공사 현장 지하 2층 천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당시 근로자 A씨가 바닥에서부터 8.8m 높이 천장에 설치된 유니트쿨러(실내기) 배관에 대한 산소용접을 위해 고소 작업대 위에 올라가 작업을 진행하던 중 발생한 불티가 천장의 벽면 속에 도포돼 있던 우레탄폼에 붙어 화마가 됐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A씨가 작업하던 실내기 주변이 상대적으로 심하게 탄 점, 근처에서 발견된 용접에 쓰이는 산소 용기와 LP가스 용기의 밸브가 열려있던 점 등을 토대로 이같이 판단했습니다.

실내기는 실내용 강제송풍식 냉풍 장치로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냉장창고 등에서 주로 사용되며 우레탄폼은 단열재로 자주 쓰이지만, 불이 잘 붙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사고 초기 폭발 소리가 잇따랐다는 생존자 진술이 나와 우레탄폼을 벽면에 칠하는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유증기가 쌓여있다가 용접 불티 등으로 인해 폭발, 화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하 2층의 우레탄폼 도포 작업은 화재 2주 전에 끝나 화재 당시에는 유증기가 남아있지 않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폭발 소리는 지상 1층에 있던 우레탄폼 원료가 담긴 드럼통이 화재로 발생한 열기 때문에 내부 공기가 팽창하면서 드럼통 뚜껑이 터진 소리로 조사됐습니다.

불길이 갑자기 치솟은 원인으로는 불이 처음에는 연기가 발생하지 않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무염 연소 형태로 진행되며 천장과 벽면의 우레탄폼을 타고 확산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소방청 관계자는 "용접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티는 1천600∼3천도의 고온으로 우레탄폼 등의 단열재에 튀게 되면 곧바로 화재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안으로 타들어 갔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본격적으로 불길이 치솟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연기 없이 우레탄폼을 타고 번지던 불이 산소 공급이 원활한 지하 2층 출입문 부근에서 폭발적으로 확산해 피해가 커진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습니다. 연기가 없던 데다 불이 천장에서 시작돼 근로자들은 타는 냄새도 맡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용접 작업을 한 A씨 역시 대피하지 못하고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A씨가 용접 작업을 하던 지하 2층의 2구역 3번 실내기와 불길이 처음 목격된 지하 2층 출입문까지는 직선거리로 33m 떨어져 있지만, 합동 감식에 참여한 기관에서 진행한 실험에서 이러한 연소 형태는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화마를 불러일으킨 문제의 용접작업은 별다른 안전조치 없이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근로자는 용접작업을 할 때 방화포와 불꽃·불티 비산 방지 덮개 설치 등의 조처를 해야 하고 2인 1조로 작업해야 함에도 이러한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화재 감시인은 당시 작업 현장을 벗어나 불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으며 관리·감독자들은 화재 위험 작업 전 안전 관련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고 화재 예방·피난 교육도 하지 않는 등 총체적인 안전관리 소홀이 확인됐습니다.

인명피해가 컸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우선 화재 당일에 평상시보다 약 2배 많은 67명의 근로자가 투입됐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계획보다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한 것입니다.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지상 2층의 경우 조리실 내부 주방 덕트와 소방배관 작업 등에 18명이 투입됐다가 모두 사망했습니다.

또 5월 초부터 진행될 예정이었던 엘리베이터 작업은 화재 발생 하루 전인 4월 28일부터 시작됐고 이 작업에 투입됐던 3명도 결국 숨졌습니다.


공사 편의를 위해 현장 곳곳에서 이뤄진 안전을 도외시한 행위들도 인명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애초 이 공사 현장의 유해위험방지계획서에는 지하 2층에서 화재 등 위험 발생 시 기계실로 통하는 방화문을 거쳐 외부로 대피할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현장에서는 방화문을 만들지도 않았다. 이에 더해 방화문이 있어야 할 공간을 비워둘 경우 결로현상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공간을 벽돌로 쌓아 폐쇄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지하 2층에서 숨진 4명은 이렇게 쌓인 벽돌을 뚫고 대피하려다가 실패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들은 당시 밖에 있던 근로자에게 전화를 걸어 벽돌을 뚫어달라고 요청해 전화를 받은 근로자들이 지하로 내려가려 했지만 화염과 열기 때문에 구조에 실패했습니다.

아울러 지상 1층부터 옥상까지 연결된 옥외 철제 비상계단은 설계와는 달리 외장이 패널로 마감돼 지하 2층에서부터 시작된 화염과 연기의 확산 통로가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비상계단을 이용한 대피가 차단돼 다수의 근로자가 대피하지 못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습니다.

우레탄폼 발포와 용접 등 화재와 폭발의 위험이 있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일정을 조정해 피하려고 한 정황도 확인되지 않아 공사 전반에 걸쳐 동시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안전조치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경찰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발주처인 한익스프레스 임직원 5명과 시공사인 건우 임직원 9명, 감리단 6명, 협력업체 4명 등 24명을 입건했습니다.

이 가운데 발주처 1명, 시공사 3명, 감리단 2명, 협력업체 3명 등 9명에 대해서는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공기단축, 안전을 도외시한 피난 대피로와 방화문 폐쇄, 임의시공, 화재 및 폭발 위험작업의 동시시공, 임시 소방시설과 비상 경보장치 미설치, 안전관리자 미배치 등 다수의 안전수칙 미준수 사실이 확인됐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한 9명은 특히 책임이 무겁다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앞으로 화재 발생과 피해 확산의 근본적 원인이 된 공기단축과 관련한 중요 책임자들에 대해 집중 수사하는 한편 공사 과정에서의 다른 불법행위 등에 대해서도 계속 수사할 방침"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번 화재는 지난 4월 29일 오후 1시 32분쯤 이천시 모가면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신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불로 근로자 38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습니다. 최근 10년간 이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온 화재 사고는 45명이 숨진 2018년 밀양 세종병원 화재뿐입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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