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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홍채로 실명확인 가능한데…금융실명법 탓에 계좌개설 못해
입력 2020-05-24 18:06 
◆ 혁신 발목잡는 금융실명제 ◆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법)이 혁신을 가로막는 사례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금융위원회가 운영하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꼽힌다. 금융위가 지난해 4월 이후 선정한 규제 샌드박스 대상 혁신금융 서비스 102건 중 금융실명법에 대한 규제 특례를 요청한 사례는 9건에 달한다. 규제 샌드박스는 규제 때문에 시행하지 못하는 혁신 서비스의 사업성을 시장에서 검증해 볼 수 있도록 최장 4년간 규제를 유예해주는 제도다. 특정 규제가 샌드박스로 특례를 받는 빈도가 높을수록 혁신금융에 제약이 크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금융실명제 규제 때문에 실제 적용이 어렵다는 얘기다.
규제 특례 적용이 많은 대표적 조항은 금융실명법 제3조다. 이 조항은 '금융회사 등은 거래자의 실지명의(실명)로 금융거래를 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 조항에 따른 가이드라인에는 비대면 계좌 개설 시 △실명확인증표 사본 제출 △영상통화 △위탁기관 등을 통한 실명확인증표 확인 △기개설된 계좌와의 거래 △기타 앞선 4가지에 준하는 새로운 방식 등 가운데 2가지를 이행해야 실명 확인이 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비대면 계좌 개설 방식이 제한된 셈이다.
핀테크 기업 아이콘루프의 '디지털 신원 증명 플랫폼'은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신원 증명 절차를 간소화하는 서비스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실명 확인 방식이 현행 제도상 실명 확인 방식에 포함되지 않아 규제 특례 적용을 받은 뒤에야 서비스의 길이 열렸다.
역시 혁신금융 서비스로 선정된 한화투자증권·KB증권의 '안면인식 기술 활용 비대면 계좌 개설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안면인식 기술을 이용해 실명확인증표의 사진과 얼굴 촬영 화면을 대조하도록 하는 서비스인데, 비대면 실명 확인 적용 방안에 '영상통화'는 포함됐지만 안면인식 기술이 빠져 있어 서비스가 불가능했다.

IBK기업은행의 '은행 내점고객 대상 실명 확인 서비스'는 은행 창구에서의 실명 확인 방법에 대해 규제 특례를 적용받았다. 금융실명법상 창구를 방문했을 때 '신분증 원본'만이 실명 확인 방식이 됐지만, 다른 인증 방식으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혁신에 애로 요인이 되는 또 다른 금융실명법 조항인 제4조는 '금융거래의 비밀 보장'을 규정한다. 이 조항은 금융회사가 제3자에게 금융거래 정보를 제공하려면 제공할 때마다 소비자에게서 건별 동의를 받도록 하고, 거래 정보의 제공 내역에 대해서도 건별로 통보하도록 규정한다. 이는 종합 자산 관리 서비스 등장에 제약으로 작용한다. 자산 관리 서비스 사업자가 금융회사에서 고객 거래 정보를 받을 때마다 소비자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 주치의 서비스' '원 클릭 예·적금 분산 예치 서비스' 등은 이 조항에 대한 특례를 인정받고서야 시장의 검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역시 혁신금융 서비스로 지정받은 금융결제원의 '금융 의심거래 정보 분석 서비스'는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 의심거래 정보를 머신러닝 기술로 사전에 감지해 예방하는 획기적인 서비스지만, 특례를 받지 않고서는 시행이 어려웠다. 금융실명법 제4조가 금융거래 정보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김학수 금융결제원 원장은 "자금 세탁 방지 시스템을 위해 고객 실명 확인 등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법 규제 때문에 처벌 위주 관행이 생기고 혁신을 가로막는 점에 있어선 '누구를 위한 금융실명제인가'를 돌아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물론 금융실명법이 긍정적으로 기능해 온 측면이 더 큰 만큼 개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김자봉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직 금융 시장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활용한 사기 사건이 발생하는 만큼 기술 발전은 조금 더 자기 입증이 필요하다"며 "기술 측면에서 상당한 신뢰가 쌓인다면 논의 가능성은 있지만, 금융실명법이 금융의 기본을 다루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의 금융규제 샌드박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법·규정은 금융실명법 외에도 많이 있다. 대출모집인 제도 모범규준 제92조 제2항, 신용정보법 제4조, 자본시장법 제11조 등이 대표적이다.
대출모집인 제도 모범규준 제92조 2항은 대출모집인이 금융회사 1곳에 전속되도록 규정한 제도다. 여러 금융회사의 대출상품을 한곳에 모아 소개하는 애플리케이션(앱) 등 서비스를 선보일 때 이 같은 규정이 제약으로 작용한다. 금융위는 여러 대출상품을 소비자에게 비교해 제공하는 것이 소비자들의 교섭력을 증가시키고 금리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해당 서비스들에 특례를 적용하기로 했다.
자본시장법 제11조는 금융투자업 인가를 받지 않으면 금융투자업을 영위할 수 없도록 한다. 이 때문에 비상장 주식을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 금융투자상품권 거래 등 서비스가 등장하지 못했다. 금융위는 금융투자상품에 대한 접근성과 자산 관리 능력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해당 서비스들을 혁신금융 서비스로 지정했다.
여신전문금융업법 제2조는 신용카드 가맹점 사업자가 결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명시했는데, 이로 인해 개인 간 중고 거래를 할 때 카드 이용에 제약이 있었다. 신용정보법 제4조는 신용조회사에만 신용조회 업무를 허용한 조항으로 해당 조항에 따르면 카드사·통신사·핀테크 업체는 신용정보 분석 업무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지난 1월 신용정보법 개정으로 이들 기업에 대한 규제가 해결됐다.
[최승진 기자 / 김강래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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