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양돈마이스터`의 고문이 된 까닭은
입력 2020-05-17 06:01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오른쪽)가 양돈 마이스터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쾌한 반란`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정혁훈 기자]

지난 8일 도드람양돈농협 대전간이지점. 6층 강당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양돈사업자 7명이 모였다. 이들은 '양돈 마이스터'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양돈에 관한한 '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마이스터는 우리나라 5000여 양돈농가들 중에서도 단 13명밖에 안될 정도로 희소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양돈 마이스터가 되려면 영농경력 15년 이상을 갖춘 사람들 가운데 필기시험은 물론 역량평가와 현장심사 등을 거쳐 심의위원회를 통과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이스터가 됐다는 것은 양돈에 관한한 기술교육과 컨설팅을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다.
네덜란드 와게닝겐대학과 공동으로 개설한 양돈 마스터 클래스에 참석한 마이스터들이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정혁훈 기자]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대전으로 모여든 이유는 네덜란드의 선진 축산기술을 온라인 원격강의로 배우는 과정의 킥오프 미팅을 위해서다. 이른바 '와게닝겐 마스터 클래스'다. 농축산분야 글로벌 1위 대학인 네덜란드 와게닝겐대학의 로버트 호스테 박사로부터 첨단 양돈기술을 전수받으려는 목적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민승규 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현 한경대 석좌교수)과 김창길 전 농촌경제연구원장(현 서울대 특임교수)이 그야말로 맨발로 뛰었다. 네덜란드쪽 섭외도 힘들었지만 국내 최고를 자부하는 마이스터들을 한 자리로 끌어모으는 것이 그보다 몇배 더 힘들었다. 농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대표급에 해당하는 양돈 마이스터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모여든 것은 양돈 기술 면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유럽 최고 수준과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양돈기술을 평가하는 대표적 잣대인 PSY(어미돼지 한 마리가 1년에 낳는 새끼돼지 마리수)가 한국은 평균 20마리가 채 안되는 반면 네덜란드는 30마리에 달한다. 이 숫자를 유럽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양돈농가들의 평생 꿈이다.
그런데, 국내 양돈업의 혁신을 위해 모인 자리에 뜻밖에도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나타났다. 김 전 부총리는 이들에게 '유쾌한 반란'을 주제로 1시간 동안 강연했다. 김 전 부총리는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형편이 어려워져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 청계천변 판잣집과 경기도 광주 천막집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던 얘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전직 고위 관료가 개인사를 진솔하게 고백하기 시작하자 나른한 오후 시간이었음에도 마이스터들은 강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 전 부총리가 말하는 '반란'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뒤집는 것 즉 혁신이었고, '유쾌하다'는 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혁신하는 것이 김 전 부총리가 말하는 유쾌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양돈마이스터를 포함한 `와게닝겐 마스터 클래스` 관계자들이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아래 왼쪽에서 네번째)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왼쪽 첫째가 민승규 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다섯째는 김태환 농협 축산경제 대표, 여섯째는 김창길 전 농촌경제연구원장. [정혁훈 기자]
김 전 부총리는 살아오면서 겪었던 몇 차례의 '유쾌한 반란'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획재정부(옛 경제기획원) 고위 공무원으로는 드물게 상고와 야간대학을 나온 김 전 부총리는 당시 쟁쟁한 중앙부처 다른 사무관들과 경쟁을 거쳐 미국 미시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물론 미국 국무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도 선발돼 박사학위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유학 첫 해 전과목 A학점을 받는 성과를 냈지만 이듬해 학점만을 잘따기 위한 공부는 별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그동안에는 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온 게 아니라 남이 원하거나 사회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하기위해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자같은 허상을 좇아가는 삶을 버리고 진짜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학점이나 학위를 따기위한 공부가 아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은 그동안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이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그런 노력이 경제관료로서의 성공에 자양분이 됐다고 했다.
김 전 부총리는 이 정부 정책기조로 자리잡은 혁신성장의 설계자답게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혁신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16세기 당시 군사력이 초라했던 영국 해군이 무적함대를 기반으로 유럽 패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 해군을 칼레해전에서 무찌른 핵심 동력이 함포의 혁신이라고 해석했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청동대포에 비해 제작비용을 4분의 1로 낮춘 주철대포를 개발해 대규모로 실전 배치한 것이 스페인 무적함대 몰락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 선생이 경세유표에서 "이 나라는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불과 70년뒤 조선이 멸망하고 말았다는 역사도 소개했다. 조선은 두 가지에 눈을 감은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는데, 그 하나가 선진눈물이고 다른 하나가 국제정세였다는 것이다. 양돈 마이스터들이 지금 네덜란드의 축산기술을 외면한다면 그게 바로 선진문물이자 국제정세에 눈을 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었다.
양돈업을 잘 모르는 김 전 부총리의 강연이었지만 이날 참석한 양돈 마이스터들은 강연이 끝난 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경남 진주에서 온 정해봉 마이스터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의 필요성을 새삼 깨달았다"며 "한국 축산업이 그동안 발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정보 공유에 대한 폐쇄적인 문화 때문"이라며 네덜란드 축산기술 전수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충남 공주에서 온 송일환 마이스터 역시 "전 부총리까지 나서서 혁신을 독려해주니 부담감이 크지만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며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고 말했다.
양돈 마이스터들은 이날 강연 후 김 전 부총리에게 고문을 맡아달라고 즉석에서 요청했고, 김 전 부총리는 "부족하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역할을 하겠다"고 화답했다. 김문조 마이스터는 "우리가 꿈꾸는 게 바로 양돈업에서의 유쾌한 반란이라고 생각하게 됐다"며 "오늘의 감동을 양돈업 혁신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전 =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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