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게 나라냐…` 정부 빈틈 노린 멕시코 마약 카르텔, `엘차포 마스크` 나눠주며 민심 포획
입력 2020-04-23 17:58  | 수정 2020-04-25 19:07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 사태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공공 의료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마약 카르텔들이 가난한 주민들을 상대로 마스크와 음식 등을 나눠주면서 환심사기에 나섰다. 멕시코 뿐 아니라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마약 카르텔이 폭력과 살인을 일삼으면서도 크리스마스나 명절, 어린이날 '복지 사각지대'인 빈민가를 찾아가 선물을 나눠주며 '자기 편 만들기'를 해왔다. 경쟁 조직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빈곤층이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코로나19사태가 오히려 카르텔에게는 기회가 된 셈이다.
멕시코 중서부 할리스코 주 과달라하라 빈민가에서는 '엘 차포(el Chapo)'의 딸인 알레한드리나 구스만이 엘 차포 캐릭터가 그려진 방역용 마스크와 음식을 나눠주면서 이미지 변신에 나섰다고 22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 과달라하라는 수도 멕시코시티(CDMX)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엘 차포는 전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이름을 떨친 시날로아 카르델 두목 호아킨 구스만 로에라의 별명이다.
알레한드리나는 올해 1월 시날로아 주 쿨리아칸 일대 카르텔 두목의 아들인 에드가르 카사레스와 결혼해 눈길을 끌었다. 알레한드리나는 성명서를 내고 "원조 작업은 모두의 친구이며 지도자인 엘 차포가 그의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것"이라면서 "전세계에서 그는 시날로아 최고경영자(CEO)알려져 있다"고 언급했다. 알레한드리나는 자신이 운영하는 '엘 차포 701'브랜드의 페이스북 홈페이지에 '차포 식품 저장소(Chapodespensas)'라고 적힌 상자 사진을 올리며 빈곤층에게 나눠줄 화장지와 콩·기름 등 생필품이 담겨있다고 밝혔다. '엘 차포 701'는 그가 아버지의 별명을 따서 만든 의류·악세서리 브랜드다. 지난 2009년 구스만이 미국 경제지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701위에 오른 것을 기념한다는 의미다.
다만 엘 차포는 지난 2006년을 즈음해 이른바 멕시코 '마약 전쟁'을 야기한 인물이다.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임기 2006년 12월~2012년 11월)이 취임 직후 마약 카르텔을 대대적으로 소탕한다면서 '마약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후 멕시코 시민 25만 여명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6만 명 이상이 실종됐다. 지금까지도 멕시코는 납치와 청부살인이 일상처럼 벌어져 치안이 불안한 가운데 조직적 마약 밀매가 오히려 성행하면서 당시 작전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대통령 밑에서 6년 간의 마약 전쟁을 책임졌던 헤나로 가르시아 루나 공공치안부 당시 장관은 지난 해 12월 미국 뉴욕 연방 검찰에 의해 마약 밀매 가담 혐의로 기소됐다. 뉴욕 검찰에 따르면 루나 전 장관은 재임 시절 엘 차포가 이끄는 '시날로아 카르텔'에 수사 정보 등 민감한 내부 기밀을 흘리는 대가로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 엘 차포는 '미국-멕시코간 마약범죄자 신병인도조약'에 따라 지난 해 7월 미국 연방법원으로부터 '마약 밀매·살인교사' 등 혐의로 총 127억달러(약 15조2000억원) 재산 추징과 '종신형+3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미국에서 수감 중이다. 추징된 재산은 멕시코에 내는 대신 멕시코에서 수감 생활을 하겠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카르텔 두목들은 멕시코 전설적 마약상이자 일부에서 '성인(聖人)'으로 통하는 헤수스 말베르데(1870∼1907년)의 '현대판 로빈 훗' 이미지를 따라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온라인 사회연결망(SNS)을 통해 자신들이 뿌린 물건이 공공기관이 아니라 카르텔이 주는 것이라고 앞다퉈 강조하는 식이다.
엘 차포 이후 멕시코에서 가장 악명 높은 조직으로 꼽히는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CJNG)도 두목인 네메시오 오세게라 세르반테스의 별명 '엘 멘초'이름을 붙인 생필품을 배포했다. 미초아칸 주에서는 무장한 '로스 비아그라스' 카르텔이 트럭에 물건을 실고 나와 빈곤 주민들에게 생필품을 나눠주는 온라인 영상으로 떠돌았고, 북부 타마울리파스 주에서는 '골포' 카르텔이 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준 것으로 알려졌다.
멕시코는 경제협력기구(OECD)가입국이기는 하지만 공공 의료 체계가 가장 취약한 나라로 꼽힌다. 가뜩이나 의약 업계의 고질적 독과점 구조와 정경 유착 문제 탓에 지난 1~2월에는 시민들이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는 코로나 사태가 본격화되기 전이다. 시위에 나선 저소득층 부모들은 공공 병원과 보건소에서 저소득 층 지원용 기초 의약품과 백혈병, 당뇨병, 심장병, 암 치료제가 동나자 아픈 자녀 약값을 제대로 댈 수 없다며 고통을 호소했었다. 이에 대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암로) 대통령이 '약 도둑'을 잡겠다면서 공공 의료 부문과 업계간 유착을 끊겠다고 나섰지만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코로나19가 덮쳤다.
멕시코 인구는 1억3000만여 명이지만 코로나19 치료 때 필요한 호흡기는 1만개 뿐이고, 인구 1000명 당 병상은 1.4개에 그친다. 보건부 예산이 줄어들면서 1인당 의료비도 덩달아 줄었고, 한편에서는 의료 기기 제조 부문도 위축되면서 코로나19용 마스크와 호흡기 대량 생산이 힘들어진 상태라고 현지 엘피난시에로 신문이 전했다.
22일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가 각 국 보건부 발표와 추가 소식을 종합한 것을 보면 멕시코 내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총 1만544명이고, 사망자 수는 총 970명이다. 아시아나 유럽에 비해 피해 규모가 덜한 것 같지만 코로나19 감염 여부를 진단할 키트 자체가 부족하다. 이 때문에 멕시코는 중국산 의료 장비에 의지하고 있다.
마약 카르텔의 원조도 공짜는 아니다. 코로나19사태 속에 전세계에서 강력범죄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멕시코에서는 오히려 살인 건수가 늘었다. 21일 멕시코 정부 통계에 따르면 3월 멕시코 살인 건수는 3078건으로 2월보다 8%정도 늘었다. 월별로 치면 2018년 6월(3158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살인이 일어났다. '사회적 거리두기'조치가 이뤄진 이달에도 하루에 100명씩 살해당하곤 한다. 일례로 지난 20일에는 114건, 바로 전날인 19일에는 105건의 살인이 일어났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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