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감산 불발 `OPEC+회의` 비하인드 스토리…멕시코는 왜 박차고 나왔나
입력 2020-04-10 17:35  | 수정 2020-04-11 18:19
코로나19판데믹이 멕시코를 휩쓴 가운데 수도 멕시코시티 대형광장 `소칼로`에서 마스크를 한 시민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출처=게티이미지·LA타임스]

"40만 배럴을 줄이라고요? 10만 배럴이라면 모를까 절대 안됩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이런 야구 명언처럼 기대감 속에 출발했던 OPEC+(국제석유기구와 주요 비회원 산유국) 긴급 감산회의는 멕시코의 거센 반대로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애초에 유가 폭락 사태를 만든 주역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대폭 감산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9일 열린 긴급 회의 초반에 나오면서 유가가 순식간에 12%급등했지만 결과적으로 산유국 갈등 속에 합의가 불발되면서 유가는 9%급락했다.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가 전세계를 휩쓴 가운데 한국 시간으로 9일 저녁 11시에 화상회의로 열린 OPEC+ 감산회의는 무려 11시간에 걸쳐 진행됐지만 감산 합의는 끝내 불발됐다. [출처=멕시코 에너지부 장관 트위터]
9일 OPEC+ 긴급 감산회의 소식에 따라 이날 글로벌 원자재 시장에서 원유값은 회의 초반 12%상승 후 결과적으로 9%떨어지는 식으로 급등락했다. [출처=야후 파이낸스]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가 전세계를 휩쓴 가운데 9일 화상회의로 열린 OPEC+ 감산회의는 무려 11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스무 여명의 각 국 에너지 부 장관들 중 눈에 띄는 사람은 로시오 날레 가르시아 멕시코 에너지 부 장관이었다. 이날 회의는 9시간 정도 진행되면서 '감산 불발'로 가닥이 잡혔고, 나머지 2시간은 감산에 반대한 '멕시코 설득의 시간'으로 진행됐다고 EFE통신이 전했다.
9일 OPEC+ 긴급 감산회의가 멕시코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간 가운데 로시오 날레 멕시코 에너지부 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유가를 안정시키자는 OPEC 에너지 장관들의 입장에 공감한다"면서도 "멕시코는 앞으로 2개월 동안 하루 평균 10만 배럴까지만 감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출처=장관 트위터]
글로벌 원자재 시장에서 원유 생산 2~3위를 다투는 사우디와 러시아가 자국 생산량을 하루 1000만 배럴까지 대폭 줄이겠다면서 다른 산유국가의 협조를 구했지만 멕시코 만큼은 완강했다. 이날 긴급 감산회의에서 OPEC+국가들은 멕시코에 하루 평균 40만 배럴 감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날레 장관은 회의 후 트위터를 통해 "유가를 안정시키자는 OPEC 에너지 장관들의 입장에 공감한다"면서도 "멕시코는 앞으로 2개월 동안 하루 평균 10만 배럴까지만 감산할 수 있다. 지난 3월에 하루 평균 178만1000배럴을 생산했는데 앞으로 두 달간 168만1000배럴을 생산하겠다는 얘기"라고 밝혔다.
멕시코는 애초에 유가 폭락 사태를 일으킨 사우디나 러시아를 비롯해 미국 등 대형 산유국들이 감산폭을 더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EFE에 따르면 멕시코가 홀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 이란 에너지부 장관은 "멕시코는 합의에서 빼자"는 제안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과 베네수엘라, 리비아는 국제 제재와 국내 문제 탓에 이번 감산 대상국에서 제외됐지만 유가 영향을 받는다. 합의가 불발된 가운데 결국 감산 논의는 10일 주요20국(G20) 에너지 장관회의로 공이 넘어갔다. 이 회의는 사우디의 요청으로 열리는 특별 회의다.
글로벌 원자재 전문가들은 멕시코의 감산 반대를 비판했다. 에너지 인텔리전스 그룹 수석 연구위원이기도 한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아비 라젠드란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멕시코 입장은 정말 이상하다"면서 "이미 페멕스(PEMEX·멕시코 국영석유사) 정유시설은 지난해에 40~45%만 가동됐다. 올해 멕시코 경제는 -10%역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이고, 이런 상황에서 원유 수요가 30%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마당에 감산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89년만의 정권 교체`를 이루며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2018년 12월 취임한 `암로` 멕시코 대통령(왼쪽)과 측근인 로시오 날레 에너지부 장관. 대통령의 경제정책 핵심은 국영석유사 페멕스 정상화를 통한 재정 확충이다. [출처=장관 트위터]
무려 11시간, 반나절에 이르는 회의 동안 멕시코의 날레 장관은 왜 혼자서 끝까지 감산을 반대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멕시코 대통령 경제정책의 핵심이 석유·에너지 산업 육성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 멕시코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암로) 대통령은 오히려 '원유 증산' 방침을 발표했었다. 러시아와 OPEC을 이끄는 사우디가 원유 증산 '치킨 게임'을 벌인 탓에 국제 유가가 폭락하자 미국을 비롯한 다른 산유국이 '감산하자'고 나선 가운데 멕시코는 오히려 증산하기로 한 것이다. 가뜩이나 코로나19판데믹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해진 만큼 멕시코 정부가 경제활성화 대책을 실행할 돈을 마련하려면 '국영 석유사' 페멕스 증산이 불가피하다.
멕시코는 산유국이지만 지난 2015년에는 '원유 순수입국'이 됐다. 요즘도 원유를 수입한다. 원유 매장량이 점차 줄어드는 가운데 새로운 투자가 잘 이뤄지지 않아 시설이 노후화된 여파다. 이런 가운데 89년만의 정권 교체'를 이루며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2018년 12월 취임한 암로 대통령은 시설 투자와 원유 증산을 강조했다.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 암로 대통령은 연방 정부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전반적으로 긴축 재정을 실시하는 가운데 사회복지 예산만큼은 대폭 늘린다는 정책을 세웠었다. 일각에서 '좌파 포퓰리스트'로 불려온 암로 대통령이 '우파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꼽히는 부처 예산 삭감과 긴축 재정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멕시코의 경제 개혁은 국제 사회 관심을 끌었다.
'제 4의 전환'을 선언한 암로 대통령이 생각한 경제 정책 핵심은 '페멕스 정상화'를 통한 에너지 산업 육성과 재정을 확충, '관광업 부흥'을 통한 청년 일자리 늘리기다. 암로 대통령은 새로 정유 시설을 마련해 국영 석유사 페멕스 실적을 높여서 나온 재정을 통해 사회복지 예산과 공공 인프라스트럭처 투자 자금을 대겠다고 밝혀왔다. 또 청년 일자리를 위해서 멕시코 유명 관광지가 포진한 유카탄 반도 전체를 도는 '마야 관광열차' 사업을 추진했다.
지난 해 1월, 멕시코 대통령이 `기름 도둑과의 전쟁`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석유·휘발유 등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시민들이 국영석유사 페멕스(PEMEX) 정유소 앞에서 휘발유를 배급받기 위해 가정용 기름 통을 세워둔 모습. [출처=EFE·엘파이스]
암로 대통령은 페멕스 정상화를 위해 '기름 도둑과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취임식에서 "기름 절도단(huachicoleo·우아치콜레오)이 국가 경제를 좀 먹고 있다"고 한 대통령은 지난 해 1월 군대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페멕스 송유관 수호작전을 펼쳤었다. 석유 절도범들이 페멕스 내부 인사와 결탁해 송유관에 구멍을 내거나 유통지점에서 몰래 석유를 빼돌리면서 페멕스가 연간 30억 달러(우리 돈 약 3조3600억 여원)에 달하는 손해를 보고, 이에 따라 나라 재정에도 해가된다는 이유에서다.
코로나19판데믹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암로 대통령이 '멕시코 시민 구출작전'을 내세우며 구제책을 발표할 때도 페멕스가 핵심이었다. 대통령은 지난 5일 저녁 기자회견을 통해 코로나 대응을 위해 재무부가 250억 페소(약 1조 2432억원) 규모 세금 감면에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대기업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페멕스가 들어갔다. 대통령은 "예산 잉여금을 활용해 중소기업과 서민 주택 마련 자금 대출을 지원할 것이며 페멕스 법인세를 감면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9개월 안에 일자리 200만 개를 만들겠다"고 밝혔었다.
이날 5일 암로 대통령은 "국제 시장에서 원유 가격이 떨어지고 있지만 멕시코에서는 하루에 40만 배럴씩 생산을 늘리게 할 것"이라면서 "국제 유가가 떨어지는 데 우리 원유를 수출 용도로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해외에서 연료를 사들이는 낭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즉, 원유 수출이 아닌 내수 차원에서 자국 원유 생산을 늘리는 한편 연료 수입은 줄이겠다는 얘기다. 원유를 단순히 수출한다는 입장에서만 보면, 감산해서 가격 폭락을 막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내수 용도로 늘리겠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입장이다.
6일(현지시간)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한 직원이 코로나19 방역복을 입고 금융 중심가 레포르마 일대를 소독하자 한 행인이 날개 조형물을 배경으로 직원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출처=로이터]
암로 대통령은 '무녜카 데 와하카'(멕시코 전통인형)라는 별칭을 얻으면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코로나19판데믹이 덮친 현재로선 페멕스 정상화에 기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한계에 부딪히는 모양새다. 지난 3일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국제 원유 가격 하락 등을 이유로 페멕스 신용등급을 BB+에서 BB로 강등했다. BB+는 이미 '투자 부적격' 등급이다.
멕시코 재무부는 올해 나라 경제가 3.9%역성장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글로벌 투자 은행들은 이보다 더 비관적이어서 멕시코가 올해 -8%선의 더 가파른 역성장세를 보일 수 있다는 예상치를 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6일 스탠더드앤푸어스는 멕시코 국가 신용등급을 기존 BBB+에서 BBB로 강등했다. BBB는 정크 바로 윗 단계다. 현지 경제지인 엘 피난시에로는 글로벌 투자자들이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기대에 못 미치고 유가도 떨어진다는 이유로 멕시코에서 자금을 회수한 결과 올해 1분기(1~3월) 60억 달러(약 7조 3272억원)가 빠져나갔고 달러당 멕시코 페소화 가치는 같은 기간 30% 떨어졌다고 전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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