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대중화 이끈 '재야사학계의 별' 이이화 별세…향년 84세
입력 2020-03-18 13:39  | 수정 2020-03-25 14:05

꾸준하고 왕성한 연구와 집필 활동으로 역사 대중화를 이끈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이 18일 오전 별세했습니다. 향년 84세.

고인은 비록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철저한 고증 작업을 바탕으로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해 역사학의 높은 장벽을 허문 재야사학계의 별이었습니다.

재야사학은 이른바 대학 중심 강단사학과 대비되는 용어이지만, 고인이 일군 학문적 업적은 전업적 학문 종사자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1936년 대구에서 주역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주역 팔괘(八卦)에 따라 아들 이름을 지었으며 '이'(離)는 팔괘 중 하나이고, 화(和)는 돌림자입니다.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고, 부친이 학교를 보내지 않아 대둔산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사서(四書)를 배웠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가출해 각지를 돌며 고학을 하다 광주고를 졸업하고 상경해 훗날 중앙대에 편입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다녔습니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생계를 잇기 위해 외판원, 술집 웨이터, '불교시보' 기자, 학원 강사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후 일간지 임시직을 거쳐 한국고전번역원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을 번역했고,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를 썼습니다. 이 무렵 '허균과 개혁사상',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같은 역사 관련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습니다. 이를 통해 얻은 명성으로 본격적인 한국사 저술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고인은 계간지 '역사비평'을 펴내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역사 공동 연구와 성과 보급을 위해 1986년 2월 설립됐습니다. 당시 소장이 정석종 영남대 교수, 부소장이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 이사장이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였습니다. 고인은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운영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제2대 연구소장을 지냈고, 고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역사를 케케묵은 옛이야기가 아닌 현실과 맞물린 오늘날 이야기로 인식한 고인은 다양한 책으로 한국사를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대표작이 개인이 쓴 한국 통사로는 가장 분량이 많다고 하는 22권짜리 '한국사 이야기'입니다.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뒤 오류를 수정해 2015년 개정판도 냈습니다.

이외에도 '인물로 읽는 한국사', '만화 한국사', '주제로 보는 한국사', '허균의 생각',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을 발간했습니다.

그는 특정 시대사에 집중하는 일반적 학자와는 달리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연구했습니다. 또 정치와 경제에 집중하는 문헌사와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생활사 간 경계도 뛰어넘고자 했습니다.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이를 입증합니다. 동학을 향한 관심은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사건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신념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민족주의 사관은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터뷰나 간담회 자리에서 이순신과 김구가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거나 열녀는 유교적 인권 유린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러한 소신이 담긴 발언이었습니다.

고인의 고등학교 후배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이이화 선생은 고졸 출신으로 역사학에서 소신껏 연구하며 일가를 이룬 인물"이라며 "민중사관을 바탕으로 탄압받은 사람들을 발굴해 치켜세우고, 역사의 아웃사이더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했습니다.

단재상과 임창순 학술상을 받았고, 2014년 원광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8년 8월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도 맡았습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 씨와 아들 이응일 씨, 딸 응소 씨가 있습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 02-2072-2010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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