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누구에게 산소호흡기 우선권을 줄 것인가"…의료계에서 커지는 윤리선택 갈등
입력 2020-03-17 13:18  | 수정 2020-03-17 15:05
최근 미국 매체 폴리티코가 이탈리아 현지 의료진의 윤리적 선택 문제를 다뤄 세계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의료진들은 쏟아지는 환자들 속에서 평등한 치료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기대생존율이 높은 젊은 환사에 의료자원을 우선 투입할 수밖에 없는 의료적 윤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고 이 매체는 보도했다. ...

"먼저 온 환자에게 치료 우선권을 주는 선착순(first come, first served) 원칙은 이미 무너졌다."
지난 9일 미국 매체 폴리티코가 인터뷰한 이탈리아 크레모나 지역 한 의사의 발언은 전세계에 충격을 줬다.
같은 코로나19 감염 환자 중 먼저 온 80대 환자와 뒤늦게 온 30대 환자 중 누구에게 병상과 산소호흡기 자원을 우선 제공하느냐에 대해 이탈리아 의료진들이 심각한 윤리적 갈등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한정된 군의관들이 생존율이 높은 군인에 의료자원을 우선 투입하는 극단의 윤리적 선택이 코로나19 사태로 신음받는 이탈리아에서 현실화했다는 뜻이었다.
이 같은 참혹한 현실은 비단 이탈리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 선진국가인 미국과 영국이 이탈리아의 비상 상황을 자국 의료 시스템에 시뮬레이션해 의료윤리 선택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70세 이상 고령자들만 특정해 수 개월 간 집에서 자가격리토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영국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BBC, 가디언 등을 통해 이 계획이 보도되자 당장 영국 국민들은 "왜 고령자를 차별하느냐"는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영국의 전설적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는 자신의 SNS에 "이게 진짜로 일어날 수 있는가. 70세 이상이면 차별을 받고 자유가 제한되는 것인가"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이 같은 처참한 의료 현실을 보면 영국의 검토 사항에 대해 마냥 격분만 할 수도 없는 흐름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차별적 조처'라는 욕을 먹더라도 선제적으로 고령자 보호를 위해 자가격리 카드를 뽑는 게 한정된 의료자원과 국민생명 보호 관점에서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의료진의 윤리적 선택 문제는 코로나19 감염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영국과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단적으로 (1)한정된 자동 인공호흡기(왼쪽)와 (2)손으로 주물러야 하는 수동형 백(오른쪽), 그리고 중증 환자가 몰렸을 경우 (1), (2)의 선택권마저 확보할 수 없는 고령 환자들의 소외 문제가 이미 ...
이와 관련해 맷 핸콕 영국 보건부 장관은 70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자가격리 검토 보도가 나오기 수일 전 "(코로나19 환자 치료에 대비해) 현재 영국 내 5000개의 인공호흡기가 구비돼 있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다"고 밝혀 정부가 의료자원 부족 사태에 대비해 다양한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더구나 영국 내 코로나19 확진자는 17일 1551명으로 이 중 56명이 사망해 치명률이 3.6%로 상당히 높다. 이는 유럽 내 같은 선진국인 독일(7272명 확진·17명 사망)의 치명률(0.23%)보다 무려 15배 이상 높은 수치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보건당국의 차별적 조치 검토에 황당한 감정을 느끼겠지만 정부로써는 유럽 내 이탈리아의 엄혹한 의료붕괴 현실을 자국 의료시스템에 대입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사전예방책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지역사회 감염이 들불처럼 퍼지고 있는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공영라디오(NPR)은 최근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D.C. 내 유명 병원인 '메드스타 워싱턴센터'마저 이탈리아 의료계의 윤리적 선택 사례를 참고해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 대응책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이 비상대응책을 담당하고 있는 병원 인사는 NPR와 통화에서 "이탈리아의 경우 누가 (자동방식의) 인공호흡기를 쓸지, 아니면 (의료진이 손으로 주물러야 하는 럭비공 모양의) 앰부백을 쓸지, 아니면 둘 중 하나도 쓰지 못하는 환자는 누구일지에 대해 의료적 선택이 이뤄졌다"며 "미국에서 이런 극단적 사례가 나와서는 결코 안 되겠지만 (이 극단적 사례에 대응한) 계획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공개했다. 미국 내 최고의 의료기관마저 코로나19 환자 폭증 국면에서 의료자원이 부족해지면 젊고 생존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우선 치료하는 비상계획을 수립했다는 뜻이다.
감염학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한국의 연령별 코로나19 감염 통계를 언급하며 고령자들의 선제적인 자가격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 = 에릭 딩 하버드대 교수 트위터 캡처]
일례로 미국 하버드대 공중보건대학원의 에릭 딩 교수는 지난 15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탈리아와 한국의 연령별 감염자 비율을 소개했다.
그는 50대 이상 감염자 비율이 높은 이탈리아와 달리 한국에서는 20대 확진자가 30%에 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탈리아가 고령자와 유증상자 중심으로 진단테스트를 했지만 만약 한국 통계처럼 20~29세 연령층이 모든 확진사례의 30%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염려했다.
바이러스 감염을 확산시키는 선도적 전달자가 젊은층으로 확인된 한국의 사례를 보면 고령층을 보다 강하게 격리보호하는 게 차별적 선택이 아닌, 보호적 예방접근이라는 게 이들의 견해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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