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연극 리뷰] `터널구간`…가족과의 삶이 어두운 터널 같다면
입력 2020-02-14 09:51  | 수정 2020-02-14 10:07
연극 `터널구간` [사진 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만나는 사람 있니? 올해는 결혼할 거지?" "회사에서 연봉은 얼마나 받니? 그 회사 계속 다닐 거야?" 요즘은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이번 설에도 누군가는 들었을 법한 싫은 소리다. 지난 7일부터 공연중인 연극 '터널구간'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더 물신숭배적이고, 더 노골적인 모습으로.
아버지 장 씨의 칠순 잔칫날 아내와 아들과 딸 그리고 사주를 봐주는 점쟁이가 한 자리에 모이며 얘기는 시작된다. 보유한 10층짜리 빌딩을 언제나처럼 자랑하는 장 씨지만 자식들 때문에 골머리다. 부동산으로 돈은 충분히 불렸으니 이제 바라는 건 '의사 며느리' '검사 사위'인데, 이 꿈을 이뤄줄 자녀들이 변변찮기 때문. 앞만 보며 살아왔던 장 씨 가문에서 사랑 한 번 제대로 못 받고 자란 그들은 어른이 돼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한다.
서른 여덟인데 친구도 없고 애인은 더 없는 아들의 병명은 껍데기 증후군이다. 겉만 멀쩡할 뿐 사람 속은 텅 빈 이 병에 전염될까봐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 싶으면 모두가 달아난단다. 결국 그가 본가로 데리고 온 건 아내 될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개뿐이다. 선이란 선은 닥치는 대로 보지만 마흔이 될 때까지 노처녀인 딸도 다를 바 없다.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법도,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법도 어느 새인가 잊어버린 그녀는 사랑이 뭔지도, 기쁨이 뭔지도 느껴본 지 아주 오래다.
연극 `터널구간` [사진 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렇게 자녀들의 행복한 유년 시절마저 희생하며 오랜 기간 쌓아올린 부가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게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그렇게도 자랑하던 빌딩은 은행 빚과 사채를 끌어다 마련한 것이었고, 장 씨가 죽자 빌딩은 물론이고 집안 모든 물건에 '빨간 딱지'가 붙는다. 재산을 탐내 딸에게 접근하려 했던 검사도 장 씨 가문이 몰락하자마자 이내 발을 끊는다.
이런 비극을 보고 졸부들을 비웃는 건 피상적 접근이다. 그보다도 작품은 '생존 자체'가 목적이 되는 팍팍한 사회 속에서 인간적 요소들을 잃어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조명한다. 극 중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 '터널구간'이 제목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상례 작가는 "삶이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이 아니라 갇힌 느낌이었음을 깨달았다"며 "부모의 논리, 그토록 가족을 지배했던 고단한 힘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주제 의식은 날카롭지만 이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도 좀 더 친절했다면 좋았겠다. 장면과 장면 사이 연결이 성긴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대화라기보다는 하나의 리듬으로서 기능하는 극 중 대사들은 신선하지만 아직 생경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지원사업 '2019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이다.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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